르완다 산 커피와 1994년
얼마전 산 커피는 르완다 산입니다. 거의 콜롬비아 산 수프레모만 마시다가, 좀 변화를 줘 보고 싶었습니다. 그냥 비슷한 가격대에서 고르기에 괜찮은 것 같아서, 3파운드의 볶은 커피콩이 담긴 포장은 15달러가 채 안 되는 가격에 팔리고 있었고, 늘 그렇듯 저는 아무생각없이 카트 안에 커피를 담았던 것 같습니다.
이곳 코스트코에서 이 정도 단위의 포장으로 팔리는 커피는 '샌프란시스코 베이' '스타벅스' 같은 브랜드 커피들이 있지만, 사우스센터나 4가에서 거대한 자체 커피 로스터를 돌리고 있는 코스트코는 그들의 자체 브랜드인 커클랜드 시그내처를 달아 아예 커피를 이리 볶아 냅니다. 어떻게 보면 저는 커피 신선도라는 면에 있어서는 꽤 호사를 누릴 수 있는 환경에서 사는 셈입니다.
그 신선도 때문에 그런가, 이 커피에서 저는 자꾸 와인을 느낍니다. 쌉싸래함, 꽃향기, 언젠가 마셨던 스페인의, 리오하보다는 뻬네데스에 가까운... 그렇지만 산도보다는 태닌의 느낌이 더 튀는. 아, 상상은 여기까지만. 이 이상 간다면 저는 오늘 비번 날임을 핑계삼아 낮술을 하게 될 지도 모르니까. 커피 콩은 기름이 배어 나올 정도로 볶아냈습니다. 프렌치 로스트 스타일로. 그렇다면 에스프레소 스타일로 마시기도 좋은 커피라는 것. 알갱이는 콜롬비아 수프레모보다는 작습니다. 물론 배전의 과정이 길어 커피 콩의 크기가 조금은 줄어들기도 했겠지요. 그래서 잘 볶아내어 까맣고 기름이 흐르는 콩은 바로 이 커피를 길러내는 그 사람들의 피부마냥 반짝거리기도 합니다.
커피 콩을 가득 담은 넓은 바구니를 수건을 쓴 머리에 이고 가는 흑인 여성의 뒷모습. 아마 이 커피 봉지에 그려진 그림 때문에 저는 어렸을 때 머리에 뭔가를 이고 다니던 행상 아주머니들을 떠올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저로 하여금 이 커피를 집어들도록 만들었을 터입니다. 지금도 머리에 뭘 이고 다니는 행상들이 한국에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 어쩌면 시골에서는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적어도 저에겐 낮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한민국이 지금의 모습을 하게 된 것의 바탕엔 다 저렇게 삶의 전선에서 최선을 다 해 왔던 한 사람 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란 생각이 문득 듭니다. 그리고 르완다 역시 20여년 전의 비극에서 헤어나오려 애쓰고 있습니다. 그들과 우리들은 참 많은 면에서 닮았습니다.
내전은 그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었습니다. 1994년, 참 이래저래 잔인한 해였습니다. 20세기 유럽의 마지막 전쟁이라던 코소보 내전 사태는 채 백일이 안 되는 기간 동안 80만이 넘는 사람들이 내전으로 학살당한 이 아프리카의 땅에 평화유지군이 들어오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아프리카의 이 작은 오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평화 수호군을 자처하던 그들은 어차피 그들의 일이 아니라며 내버려뒀겠지만. 더 끔찍한 건, 이 수많은 사람들이 내전으로 희생당할 때 대포나 항공기나 탱크가 동원된 게 아니란 겁니다. 총, 그리고 마셰테라고 부르는 날이 넓적한 정글칼, 낫, 괭이, 망치...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들은 역사 안에서 충분히 찾아볼 수 있고, 르완다 역시 그 범주로 쉽게 넣을 수 있을 겁니다.
1994년 그 해,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한국에서도 전쟁이 일어날 뻔 했습니다. 이곳에서 '들을 귀 있는' 동포들은 시시각각 전해져 오는 뉴스에 부르르 떨었습니다. 미국은 그 해 3월부터 시작된 이른바 '북핵 핵위기'에 대해 강경책으로 일관하기 시작했고, 6월이 되면서 자국민에 대한 철수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상황은 심각했습니다. 이곳에서 평화운동을 벌이던 동포들은 미국 내 양심세력들과 대오를 함께 하며 뉴욕 타임즈와 워싱턴 포스트 등 주요 일간지에 전면광고를 내기 위해 모금운동을 벌이고 다녔고, 결국 미국의 지식인들에게 그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알리는 데 최선을 다 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르완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던 그 해, 한반도에서는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질 뻔 했던 겁니다. 그 해 5월 18일 이미 공습을 위한 명령이 내려졌고 한반도 해상에서는 다섯 척의 항공모함이 공습을 위한 대기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니 미군 5만명, 한국군 40만명 이상의 사망자가 나올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고, 이미 한반도에서 한번 덴 경험이 있는 미국으로서는 이후 있을 선거에서 민주당 정권이 재창출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클린턴 행정부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우리나라는 한국전쟁 때 이념으로 갈라져 싸웠다고 하지만, 정말 그 당시에 그 이념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정확히 알고 싸움터에 나선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리고 군인들보다 더 비참했을 보통의 사람들, 그 백성들, 그 사람들에겐 무슨 죄가 있었을까요? 르완다는 후투족과 투치족으로 나뉘어 내전을 벌이고 끔찍한 학살이 벌어졌지만, 학자들은 이곳에는 원래 후투나 투치의 개념이 없었으며 벨기에가 이곳을 식민지화하면서 이들의 분할 통치를 쉽게 하기 위해 이런 개념을 만들어 퍼뜨렸다고 합니다. 한국의 지역감정, 더 정확히 말하면 지역차별이란 것과 무엇이 다른지요.
원래 쌉싸름함이 특징인 커피이고, 흙내음 속에 꽃내음이 살짝 퍼지는, 그런 특징이 있다고는 하는데, 어쨌든 커피가 시큼함은 없고 씁쓸함이 강조됩니다. 적당한 산미가 배어나는 수프레모와는 또 다른 맛이지만, 아마 저는 이 커피를 한 두어 주 동안은 꽤나 즐기겠지요. 그러나 이 커피 한 잔을 즐기는 것이, 어쩐지 이렇게 이런저런 생각들로 이어지는 것은 결국 내가 한국 사람이며, 아픈 역사들을 잊지 않고 있어야 한다는 어떤 다짐 때문이겠지요. 우리가 만들어 내야 할 시대는 결국 우리 자신의 앙가주망을 늘 요구하고 있으니.
시애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