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일본 정리정돈 전문가 ‘곤도 마리에’가 발간한 저서 <정리의 힘>에서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고 외치며 전세계적으로 ‘곤도 마리에식 정리법’ 열풍을 일으켰습니다.
저 역시 나이가 들어가면서 시간만 있으면 뭔 가를 정리해야 할 것 같은 강박마저 생겨납니다
특히 한 해를 마무리 져야 할 요즘 같은 시기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묵힌 먼지도 털어내며 대청소도 해야 할 것 같고 옷장에 몇 년 동안 입지 않았던 옷들은 이제는 정말 정리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조급함마저 생겨나기도 합니다. 지난주일 옷장 선반에 가득 쌓아둔 상자들을 먼저 정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 올 때부터 갖고 왔던 상자들이었습니다.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기억조차 없는 물건입니다.
첫 번째 꽃무늬 상자부터 열었습니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열듯이 20여 년 만에 열어본 상자 안에는 30년도 더 된 추억과 사연들이 가득했습니다. 결혼 전 남편과 주고 받았던 편지와 기념일 카드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기억 조차 나지 않는 수 많은 감정들과 추억들이 잉크도 흐려져 빛 바랜 고 문서처럼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빨간 색 상자를 열었습니다. 첫 아이가 두 살 이었을 때 아이에게 쓴 크리스마스 카드와 아이들이 유치원 부터 초등학교에 이르기까지 부모에게 써 준 편지와 카드들이 가득했습니다. “엄마, 아빠 사랑해요, 힘내세요….” 그림을 그리고 삐뚤빼뚤한 글씨로 만든 카드들을 보는 순간 숨겨둔 보물을 발견하듯이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그리고 나의 대학 졸업 논문이 있었습니다, 졸업 논문 읽어봤습니다. 파스칼의 <팡세>에서 파스칼의 “인간학”을 주제로 두껍게 써 내린 글들을 다시 읽으면서 너무나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나의 젊은 시절의 고뇌와 이상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면서 나에게도 이토록 빛나던 시절이 있었음에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상자 안에는 태극기가 반듯하게 접혀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삼일절, 광복절 등 국가 기념일마다 걸어뒀던 태극기 이였습니다. 이민 올 때 최소한 한국인의 정체성을 잊지 말자는 마음으로 간직해 왔는데 아쉽게도 한번도 태극기를 꺼내 게양 할 수 없었습니다. 미국 집들 앞에 걸어둔 성조기를 볼 때 나도 당당히 내 집 앞에 태극기를 걸어 두고 싶었으나 상상으로만 족해야지 미국에서 튀는 행동을 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송구영신을 잘 하기 위하여 정리를 결심 해보지만 어찌 이 세 상자 중 어느 것 하나도 가슴이 설레지 않은 것이 있을 수 있을까요?
결국 저릿저릿하고 먹먹한 가슴을 안고 나의 역사와 추억을 닫아서 있었던 자리 옷장 선반에 다시 쌓아 두었습니다.
이제 다사다난 했던 2024년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전 세계적으로 경제 불황과 자연 재해와 아직도 진행 중인 전쟁, 그리고 대한민국의 혼란한 정국까지 너무나 많은 일들이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천년전 죄 많은 이 세상에 예수님이 사랑과 평화의 구원자로 오셨는데 세상은 여전히 죄가 창궐하고 더 악해져만 갑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를 맞이해 평소 보다는 조금은 더 따뜻한 시간들을 보내게 될 것을 기대합니다. 잠시 전쟁도 정쟁도 멈추고 가족들과 함께 촛불을 밝히고 정성껏 준비한 음식과 선물도 나누며 서로 축복하며 연말을 보낼 수 있길 바랍니다.
한 해를 마무리 하면서 쌓여둔 물건들을 정리 하고 대 청소를 하더라도 버려야 할 것과 간직해야 할 것들을 잘 구분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가슴을 설레이게 하고 삶의 희망과 원동력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한 해 동안 저의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케이시애틀 독자 여러분 모두 송구영신 잘 하시고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 글쓴이 LaVie
- 전 금성출판사 지점장
- 전 중앙일보 국장
- 전 원더풀 헬스라이프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