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부재, 그리고 절실히 느끼는 나의 무능(?)
큰아들 지호가 내일 있을 피아노 경연을 위해 연습하는 것을 들으며, 벌써 두 팟 째의 얼그레이 티를 마시며 '외로운' 밤을 달래고
있습니다. 자기 전에 아이들 피짜 먹은 뒷정리도 해야 하고, 설겆이도 해 놓아야 합니다.
아내는 오늘 아침 공항에서 손을 흔들며 검색대 너머로 걸어들어갔습니다. 마음이 조금 무거웠습니다. 장인께서 몸이 안 좋으셔서, 암튼 기쁘고
좋은 일로 가는 것은 아니어서 마음이 무거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저는 아내가 뉴욕의 친정에 가 있는 기간 동안 휴가를 냈고,
졸지에 소년... 아니 중년 가장으로 전락(?)한 셈입니다.
지호와 작은아들 지원이가 그렇게 신경쓰이는 아이들은 아니지만, 문제는 일상의 자잘한 것들을 제 손으로 직접 해 주는 것이 쉽지 않을 거라는
사실에 제가 지레 겁먹은 게 아닌가 하는 겁니다. 청소, 설겆이, 빨래 등등.. 그동안 제가 아내를 실질적으로 도와줘 왔던 것들이 무척
제한적이었구나 하는 생각도 문득 하게 됩니다. 그래도 아이들 밥 해 먹이고 설겆이 하고, 청소하는 것 까지는 자신이 있는데, 미국말로 There
will be problems beyond this point 라고 해야 할까요. 암튼 부딪히기는 해 봐야겠지요.
사실 집안일이라는 게, 해도 해도 끝도 없을 뿐 아니라 티도 안 나는 일이긴 합니다. 다행히 그걸 저도 전혀 모르지는 않기에, 늘 아내에게
고맙고 또 지금의 저를 만들어 주신 부모님께도 감사할 일입니다. 특히 늘 정리정돈 못하고 늘어놓던 제 뒷정리를 다 해 주시던 어머니...
아무튼, 두 아들놈들도 분명히 제 피를 이어받았기에 아무리 정리해놓아도 딱 3-4 분이면 원상회복(?) 다 시켜놓는 녀석들이라, 이 기회에
정리정돈에 관한 철저한 교육...을 시키려고 했는데, 누가 누굴 가르치는거냐... 라고 말씀하시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하하.
아마 어머니께선, "이제 네가 당해봐라" 라고 말씀하시진 않을까요? 내일 아침 지호 피아노 연주 보러 오시는데, 그때 어머니께 이 질문을
던져봐야겠습니다. 아니, 아내가 전화할 때... 모르긴 해도 제겐 보약같은 시간이 될 법 합니다.
그래도 짬짬이 시간을 내어 글도 쓰고, 정리해 놓고 아이들 학교 보내놓고 집에서 음악감상도 하며, 차도 많이 마시게 될 것 같습니다.
요즘은 이상하게 와인보다도 차가 더 당기는군요. 참 이상한 일입니다. 지금은 그만큼 긴장하고 있다는 것의 반증일까요? 아내가 돌아올 즈음이 되면
제 모습이 말년 병장같이 되어 있진 않을까요? 아이들 빡세게 굴리고... 아니면 반대로 아이들이 말년 병장처럼 굴고 있을까요? 저는 그때까지도
훈련병 모드...? 하하. 아내도 놀러 간 것 아니니 마음에 걸리긴 합니다. 아무튼 장인어른도, 저희 부모님도... 늘 건강하셨으면
좋겠는데.
저도, 이제사 나이먹어가면서,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인생을 알아가는 모양입니다. 때로는 이런 가벼운 시험들을 통해서 '비상시에 적응하는
훈련'들도 조금씩 해 가면서... 우리가 부부로 살면서 이 정도로까지 딱 분업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그녀의 부재로부터 확인하면서, 아내가
돌아올 때 어떻게 기쁘게 해 줄까를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일단, 오늘 설겆이부터.
시애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