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차를 한 잔 마시려고 찾는데, 집에 홍차가 똑 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다른 허벌 차들도 있는데 꼭 홍차가 마시고 싶은 그런 때, 약간 짜증 같은 것이 일었습니다. 별로 짜증낼 일도 아닌데, 아마 제가 수양이 덜 된 것의 반증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제 밤 멀리서 저를 찾아 온 좋은 손님과 맥주도 한 잔 잘 마시고 세상에 어떻게 보면 부러울 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인데.

 

 

설마 홍차 한 봉지가 없으랴 싶어 찬장을 뒤지고 있는데 알미늄 봉지에 고무줄로 꽁꽁 싸인 것이 하나 보이는데, 아무래도 저것도 차이지 싶어서 봤더니, 역시 찻잎입니다. 그런데 봉지를 여는 순간에 알싸하게 퍼지는 이것은... 온갖 스파이스의 향. 계피와 올스파이스의 냄새가 확 풍깁니다. 아니, 이것은... 마켓 스파이스 차? 그런데 이렇게 티백이 아닌 루즈한 것이...? 가만히 기억을 되짚어보니 아내가 지원이를 가졌을 때인가, 굳이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까지 와서 사 가지고 집에 가서 마시던 차가 남았던 것을 꽁꽁 묶어서 나머지를 어디 찬합에 넣고 보관해 오던 것을 제가 찾은 것입니다.

 

 

마켓 스파이스 차는 시애틀 지역의 명물,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이라는 재래시장에 자리잡고 있는 차와 향신료 전문점에서 만들어낸 자기들만의 독특한 차입니다. 보통 찻잎에 말린 생강, 올스파이스, 계피, 마조람, 정향... 등등을 섞어서 온갖 향이 나도록 제다한 것이지요. 차 자체도 실론산의 꽤 좋은 찻잎을 쓰기에 깊습니다. 그리고 보면, 커피와 달리 차는 이렇게 오래 보관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군요. 이게 벌써 10년은 훌쩍 넘겼을 것인데, 이렇게 지금 다시 우려내니 예전의 풍미가 다시 이렇게 그대로 느껴지는 것을 보면.

 

 

차 한 잔을 마시면서 순간 참 많은 기억들이 뇌리를 스칩니다. 사실 이 차는 아내와 제가 결혼하기 전부터 우리를 맺어준 매개물이기도 했습니다. 이 사람을 알게 되고, 제가 뭔가가 눈꺼풀에 씌어 완전히 이 사람 아니면 안되겠다고 난리를 칠(?) 무렵이었습니다. 당시 그녀는 뉴욕에 살고 있었고 저는 시애틀에 살고 있었습니다. 완전 '잠못이루는 시애틀'이었던 셈이죠. 때때로 저는 이곳의 특산품들을 그녀에게 우편으로 진상(?)하곤 했는데, 마켓스파이스 차는 가끔 그녀로부터 편지나 전화로 조공(?)을 요구받기도 했을 정도로 아내의 마음을 사로잡은 차였습니다.

 

 

임신 초 속이 울렁거리곤 할 때 아내는 이 차를 찾았었습니다. 그만큼 향도 괜찮고, 속도 달래줄 수 있는 차라는 것이지요. 홍차를 뒤지다가 우연히 나온 이 차가 이렇게 꽤 우러나 향을 뿜어내는 동안, 저는 마음 속에 꽤 오랫동안 담겨는 있었지만 말라 있었던 추억들에 뜨거운 물을 부어 차를 우려낸다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갑자기 제 얼굴에 미소가 번집니다. 아, 그리고 보니 이제 결혼 16년차가 되어 가는, 처음 만난 때까지 하면 거의 20년동안 서로를 알아 온, 어쩌면 좀 물릴 듯도 하고 권태로울 듯도 한 우리 부부를 이렇게 지금까지 나름 재미있는 결혼생활을 유지 가능하도록 지켜주고 있는 것들은 이렇게 함께 했던 추억들, 그리고 같은 추억들을 되살려주는 이런 매개물들로 이뤄져 있는 것도 같군요.

 

 

 

시애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