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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목동과 월남전투

에세이
에세이
작성자
박태준
작성일
2021-07-03 11:55
조회
451

마지막 목동과 월남전투

2021. 6. 30.

내가 국민학교 1학년 8살 때 였다. 5월 초순 녹음이 짙어지는 어느 날 오후 할배가 송아지 한 마리를 몰고 집에 왔다.

송아지는 갓 젖을 뗀 암 송아지였고,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콧등이 까만 것이 참 예뻐 보였다.

할배가 나를 불렀다. 이 송아지는 꺽쇠 집에서 배내기 소로 가져왔다. (배내기는 남의 암 송아지를 키워서 어미가 되어 새끼를 낳아 젖을 떼면 어미소는 주인에게 돌려주고, 그 송아지를 어미소 키운 댓가로 받는 것) 내일부터 네가 이 소를 먹이고 돌보아야 된다고 하면서 약간의 방법과 주의사항을 말해주었다.

우리 동네는 소가 약 10마리 정도 있었는데 소꾼이 형성되어 모여서 같이 한 곳으로 먹이러 다녔다. 나는 그 틈에 끼여 같이 한 무리에 속했다. 처음이라 앞선 선배 소꾼들이 시키는 대로 했다.

선배들은 옛 부터 소꾼에게 내려오는 중요 내용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독 있는 뱀의 구별, 독초 / 독버섯, 벌에 대한 대처 방법, 먹어서는 안 될 열매 등등.. 내가 어리다고 참 잘 해 주었다.

하루도 쉬지 않고 죽어라고 따라 다녔다. 내가 쉬면 소가 굶으니까. 그 때는 사료가 없고 오직 풀 뿐이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어린 나이에 내가 맡은 일이라고, 또 앞으로 소가 한 마리 생겨 우리 재산이 된다는 생각에 어떻게 그 어린 마음에도 그런 생각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배고프고 힘든 생활에서 인간의 본능이었을까?

그럭저럭 1년, 2년이 지나면서 제법 소꾼 베테랑이 되어갔다.

집집마다 1마리의 소를 몰고 나오는데 나보다 5~10살 많은 선배 소꾼들은 바지게를 지고 와서 소 떼는 나에게 맡기고 그들은 풀을 베러 가고 나 혼자서 소떼를 돌보았다.

소의 무리는 선두만 방향을 잘 조정하면 함께 무리를 잘 따르는 편이었다.

간혹 물이 먹고 싶은 소는 이탈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소를 물 먹이고 잘 돌봐야 했다.

하루에 소와 같이 있는 시간이 거의 7~8시간인데, 새벽 먼 동이 트는 때부터 학교 가기 전 약 3시간, 학교 마친 후 시작해서 해 질 때 까지 5시간 정도를 산야에서 보냈다.

배고픈 시절 집에서 밥도 제대로 배불리 못 먹는 시절 나는 배가 고프면 주로 산야에서 스스로 해결했다.

선배 어른들이 가르쳐 준 독초, 독 열매 등을 제외한 어떤 것도 먹었다. 더덕, 산 도라지, 쎄총, 창출, 딱주 등 뿌리는 발견되면 대부분 물이 없는 데서는 그냥 잔디에 털털 털고 문질러서 덜 털리는 흙과 함께 먹었다. 찔레나무순, 아카시아 나무 순도 먹었다. 산딸기와 줄 딸기는 최고급이었고, 개구리, 뱀 등도 구워 먹었다. 그래도 먹을 것을 못 찾을 때에는 솔잎을 한 주먹씩 따서 씹어 먹었다. 솔 잎은 시큼 텁텁하여 씹을 때 한 쪽 눈이 지긋이 감겼다. 개미가 잔디 위에 줄을 지어간다. 그 옆에 엎드려 지나가는 개미를 잡아서 단단한 머리 가슴은 버리고 말랑한 배만 떼어 먹는다. 그런데 너무 신맛이다.

나는 집에서 상해서 쉰 나물, 찌짐 등을 버리는 일 없이 다 먹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추석 날 찌짐은 전 날 만든 것이다. 그 날 오후가 되면 쉰 냄새가 나고 다음날 찌짐을 떼면 상해서 피자처럼 곰팡이의 하얀 줄이 줄줄 나온다. 그래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다 먹었다. 그런데도 탈이 나지 않았다. 어떤 음식을 먹어도 지금까지 탈이 나는 경우가 없다. 소화 능력이 내가 생각해도 특별한 것 같다.

나는 감기 몸살을 하지 않는다. 산야를 그렇게도 수 없이 누비고 다니면서 수많은 상처가 생겨도 곪는 경우를 못 봤다.

오랫동안 풀, 약초 뿌리와 함께 흙을 먹고 그 속에 있는 균들과 싸워 적응 한 것이 아니었을까? 개미는 최근 듣기로 개미산이 면역에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소화는 그 험한 것을 먹고 이겨낸 결과 인 듯 하다. 치아도 처음 어릴 때 난 것이 하나도 손상이 없고 그대로다. 나의 형제자매 5명은 감기도 하고 이빨도 많이 상했다. 뭔가를 생각케 한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또 자녀들에게 너무 예민하게 과잉 보호만 한다. 피하지 말고 붙어서 이겨 저항력을 길러야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소와 나는 정이 들었고, 말을 못해도 눈치로 서로의 마음을 안다. 학교 갔다가 선생님한테 꾸중을 듣고 기분이 안 좋으면 소가 나를 슬쩍슬쩍 곁눈질하며 내 눈치를 본다. 내가 그것을 알아차리면 아닌 척 하고 얼굴을 푼다. 소가 나의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안다.

소는 자기 능력으로 못하는 것이 있다. 소 몸에 붙어서 피 빨아먹는 까분다리 (진드기) 이다. 까분다리가 소 몸에 수없이 달라붙는다. 큰 것은 아주까리 (피마자) 크기와 같고 모양도 비슷하다. 나는 오후 산으로 출발하기 전에 소꾼 집결지에서 우리소 턱 밑에서 부터 배, 사타구니 등 몸에 붙어 있는 진드기를 하나하나 떼어낸다. 얼마나 소가 가려울까.. 내가 만든 소 긁는 도구로 목, 배, 사타구니 등을 긁어준다. 소는 행복한 눈으로 눈을 멍하니 내려 깔고 있는다. 사타구니 안쪽을 긁을 때에는 소가 긁는 쪽 다리를 들어준다. 내가 긁기 쉽도록 하는 것 같다. 그리고 다 끝나면 앉아있는 나 에게로 와서 빡빡 밀은 까까머리인 나의 머리를 핥아준다. 소의 침이 내 머리를 타고 흐른다. 그래도 더럽지 않다. 소가 고맙다고 성의로 표현하니 나도 흐뭍하게 그냥 있는다. 말 못하는 소도 영물 인지라 고마움을 알고 있는 것 같다.

가끔 일기예보가 없는 시절, 어쩌다 산야에서 천둥 번개와 함께 소나기가 갑자기 내린다. 그러면 우리 소가 고개를 들고 나 있는 곳으로 바삐 온다. 그러면 내가 소 사타구니 젖 밑에 들어가 쪼그리고 앉는다. 소는 소나기가 지나 갈 때 까지 꿈쩍도 않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다. 덩치 큰 소가 나를 보호 하는 것 같다. 내가 같은 식구라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나는 소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안다. 산기슭 밭에는 콩을 심고, 그 사이사이와 밭둑에 수수를 드문드문 심는다. 소는 밭에 들어오면 안되므로 나는 혼자 가끔 밭에 들어가서 소가 좋아하는 수수대의 진 잎사귀 (밑으로 쳐져서 못 쓰는 잎) 를 따 모아서 한아름 소 한테 가져간다. 소는 이미 자기 줄 것이라고 아는 듯 멀리서 유심히 나를 본다. 소 한테 가서 한 입씩 되도록 한 웅큼씩 손으로 먹여주면 맛있게 먹는다. 먹는 소의 선한 눈이 참 행복해 보인다.

소 먹이러 가는 곳이 여러 군데가 있다. 안터, 개장골, 도둑골, 청골 밭골, 양반 무덤골, 피골먼당 등 풀 많은 곳을 찾아 차례로 돌아가면서 간다. 그 중 안터와 개장골은 바다와 가까이 있다. 나는 가끔 그 곳으로 갈 때 다른 사람에게 소를 돌보라고 하고 바다로 먹을 것을 찾아 혼자 간다. 삼베 주머니를 허리에 차고 간다. 보통 조개 잡이 아낙네들이 들어 갈 수 없는 깊은 곳으로 간다. 그 곳은 큰 조개가 제법 많다. 나는 잠수를 해서 꼬막 등 조개들을 잡는다. 하나라도 더 잡으려고 숨을 참는다. 끄윽끄윽 목에서 소리가 날 때까지 참는다. 조개를 잡아와서 여럿이 둘러 앉아 구워 먹는다. 참 꿀맛이다. 여러 해를 계속하니 숨을 오래 참는다. 뒷 날 육사 생도시절, 체육대회에서 잠수 멀리 가기 시합에서 우승했다. 2위 생도는 풀장을 겨우 편도 1번을 채 못 가는데 나는 왕복을 하여 거리가 2배이상 차이가 났다. 그것도 소 먹이는 시절 바다에서 잠수로 조개 잡이 한 덕분일 것이다.

우리 소꾼에게도 잔칫날이 있다. 그것은 일년에 한 번 있는 ‘소꿈배기’ 이다. 옛날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풍습이다. 소꿈배기는 음력 칠월 칠석날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를 건너 만나는 날이다. 그 날은 소를 산에다 쳐 놓고 풀을 베러 가거나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전부 다 모인다. 먹을 것이 없고 물자가 부족한 시절, 형편이 좀 괜찮은 집에서 밀가루를 가져온다. 설탕이 귀하고 없는 때라 단맛을 내기 위해 사카린을 넣어 반죽을 하고, 양철판 위에 구워서 먹는다. 음료는 산 속의 샘물이다. 너무 맛있다. 그 당시 해마다 그 날이 가까워오면 기다려지곤 했다. 요즈음의 양과자 빵이 그것보다 맛있을까?

초식 동물인 소가 못 먹는 풀이 있다. 그것은 이상하게도 사람이 잘 먹는 풀이다. 그것은 고사리, 깻잎 (참깨잎 / 들깨잎), 비름나물 (참바름 / 쇠바름) 이다. 소가 풀을 뜯어 먹다가 섞여서 들어가면 고개를 들고 혀를 날름 거리면서 기술적으로 가려내어 뱉어  낸다. 그 외는 다 먹는다. 심지어 냇가에 자라는 영국대라는 독한 풀도 먹는다. 그래도 괜찮다. 그 풀은 찧어서 냇가 물 속에 풀면 물고기들이 독해서 뒤집어진다. 물고기 잡을 때 사용도 한다. 왜 사람은 소가 안 먹는 풀을 골라서 먹을까? 연구 대상이다.

소는 몸에 열이 나거나 아프고 설사를 하면 먹지를 아니한다. 아무리 맛있는 것을 앞에 놓아주어도 안 먹는다. 나을 때 까지 안 먹는다. 자연치유 방법일까? 사람도 단식을 하면 백혈구가 많이 증식한다더니 말 못하는 소가 자연치유 하는 방법인 모양이다.

소 먹이는 진자산이라는 바다에 접한 곳이 있다. 한 여름 매우 더울 때 소를 몰고 바다 물 속으로 들어 갈 때도 있다. 그런데 소가 짠 바닷물도 잘 먹는다. 할배가 소한테 바닷물을 먹이지 말라고 했다. 이유는 소 코가 세어져 (감각이 무뎌져) 소 고삐를 당겨도 말을 잘 안 듣는다고 했다. 그래도 더워서 소와 같이 바닷속으로 들어간다. 의외로 소가 헤엄을 잘 친다. 가느다란 발로 헤엄을 잘 치니 신기하다. 대체로 달리기를 잘하는 짐승들을 관찰하면 발목이 몸에 비해 가늘다. 소, 말, 사슴, 돼지 등. 사람만이 발목이 굵다.

어느 날 학교에서 집에 오니 사람이 아무도 없다. 다들 어디 간 모양이다. 배가 고프다. 먹을 것이 있나 하여 부엌에 갔다. 부뚜막에 보니 보리밥 소쿠리에 삼베 밥 수건이 덮어져 있다. 걷어보니 엄마가 국수를 많이 삶아 놓았다. 배 고픈 김에 큰 사발에다 국수에 찬 물을 부어 넣고, 다른 넣을 것이 없어 사카린을 넣어 달게 하고 한 사발 먹었다. 맛있다. 아무도 없다. 더 먹고 싶다. 한 사발 더 먹고 또 한 사발. 3사발이나 먹었다. 배가 부르다. 소를 몰고 소 집결지 숲으로 가서 소 꾼이 다 모일 때 까지 있다가 줄을 지어 소 먹이는 데로 출발한다. 한참을 가는데 배가 아프기 시작하더니 식은땀이 나고, 숨 쉬기가 힘들다. 앞이 캄캄 해지고 배가 너무 아프고 갑갑하다. 움직이기가 어렵다. 이런 경우가 처음이다. “워~어” 하고 소를 세우고 밭 둑에 비스듬히 기대어 엎드렸다. 앞선 소 꾼 들은 가고 우리 소와 나만 남았다. 뒤따라 오던 친구 명일이가 따라서 멈춘다. 우리 소가 아픈 표정을 하고 괴로워하는 나를 유심히 본다. 얼마지 않아 구토가 시작되고, 먹었던 국수가 부풀어 엄청난 양이 나온다. 내가 보아도 먹은 것보다 엄청 많다. 토하니 살만 하다. 평소 같으면 소가 밭둑 풀을 뜯을 것인데 그 때는 소도 풀을 뜯지 않고 내 옆에 서서 우두커니 나만 바라보고 있다. 소가 걱정인 모양이다. 소가 나를 보는 눈빛이 평소와 다르다. 나는 소의 마음을 안다. 소가 고맙다. 그 날 후로는 국수는 보기도 싫다.

모심기 철이 되면 엄마가 남의 집에 모 심으러 간다. 우리 엄마는 동네에서 모 잘 심는다고 소문이 나 있다. 못 꾼 구하는 집에서 가끔 서로 데려 갈려고 한다. 엄마가 모 심으러 가는 날, 나는 젖 먹이 동생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점심 때를 맞추어 업고 모 심는 곳으로 간다. 젖 먹이러 가면 밥을 얻어 먹을 수 있다. 가면서 걷는 밑에 동생을 데리고 간다. 가면서 나와 동생 숟가락을 가지고 간다. 원래 주인집에서 계산 안 된 인원이기 때문이다.

마구들 논두렁을 따라 젖 먹이는 업고 동생을 걸리고 멀리 엄마가 모 심는 곳으로 가까이 가면 엄마가 모를 심으면서 힐금힐금 우리를 본다. 점심 모 밥을 머리에 이고 주인집 일꾼 아주머니들이 온다. 주인 인 듯한 사람이 점심 먹자고 소리를 치면 엄마가 얼른 우리가 있는 논둑길 약간 넓은 곳으로 온다. 엄마와 같이 풀 섶에 앉자 마자 엄마는 젖 먹이 동생을 얼른 안고 젖을 먹인다. 그러는 사이 모 밥을 나르는 사람들이 박 바가지에 밥과 반찬을 담아오고 생선은 감나무 잎에 싸서 가져온다.

엄마는 나와 동생보고 밥을 먼저 먹으라고 한다. 젖 먹이 젖을 빨리면서 나와 동생 먹으라고 생선뼈를 볼가 준다. 많이 먹으라고 한다. 밥 먹는 동생과 나를 쳐다보는 엄마의 눈빛이 사랑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하다. 지금 글을 쓰면서 눈물이 자꾸 난다. 밥이 참 맛있다. 일년 농사 잘 되라고 주인이 일꾼들에게 맛있는 음식으로 대접한다. 팥을 넣은 찰 밥에다 생선, 소고기 국 등 평소에 못 먹는 것들이다. 젖을 다 먹인 동생을 내가 받아 안으면 그 때 서야 엄마가 맛있게 밥을 먹는다. 그리고 밥 먹은 후 잠시동안 엄마와 동생들과 같이 쉬는 시간이 참 행복했다.

논 주인의 작업 시작 소리와 함께 엄마는 모 판으로 가고 나는 젖 먹이를 업고 동생을 손을 잡고 걸으면서 논길을 따라 집으로 온다. 할매는 돌아가셔서 안 계시고, 할배한테 젖 먹이와 동생들을 맡기고 나는 소를 몰고 나간다.

모 심기 철이 일년 중 소가 제일 고생 할 때다. 농기계가 없는 시절. 온 들판의 논은 소가 쟁기질 하고 써레질하여 모를 심을 수 있도록 준비한다. 소가 없는 집은 소 있는 집의 일꾼과 소를 기다린다. 물론 삯을 주고 한다. 모심기가 끝날 때 까지 거의 한 달 가량을 아침 일찍부터 해 질 때 까지 쉬지 않고 일을 한다. 시키는 대로 하루 종일 같은 일을 반복한다. 너무 힘들어 보이고 불쌍하다. 그 때 나는 산에 가는 대신 풀을 베어오면 할배가 그 것으로 가마솥에다 소 죽을 끓여서 소한테 가져간다. 소가 잘 먹는다. 나는 속으로 소가 요령도 좀 피우고 앉아 쉬기도 하고 하지 하루 종일 일을 하니 안쓰럽기도 하고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소 처럼 미련한 놈아” 라는 말도 있나 보다.

어느 날 오후 한 번은 소가 힘들었는지 일하다가 물이 가득한 물 논에 주저 앉았다. 아무리 “이랴” 라고 고함지르고 매로 때려도 일어나지 않고 꿈적도 않는다. 눈만 껌벅인다. 힘의 한계가 온 모양이다. 할배가 일꾼들 먹을려고 가져온 대병 막걸리를 소 코 두레를 들어 입을 벌리게 하고 목에다 대고 한 되를 소에게 부어 넣어 먹인다. 얼마 후 4~5분이 지났을까.. 소가 벌떡 일어나 힘이 생겨 펄펄 날 듯이 일을 한다. 막걸리 힘이 대단하다.

소는 하루 일을 마치고 어둑 해져야 집에 온다. 소 죽을 베어온 풀과 함께 먹이고 소도 쉰다. 소가 앉는다. 나는 보리단을 깔고 소 옆에 앉아 소 멍에를 씌웠던 소 목 윗 부분을 주무른다. 어른 주먹보다 더 큰 덩어리가 소의 멍게 멘 자리에 부어 올라있다. 마음이 아프다. ‘이 말 못하는 소야’ 라고 혼자 생각한다. 어두워지는 저녁, 나와 소는 말이 없지만 무언가의 마음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소가 가만히 있다가 간간히 나를 힐금힐금 본다. 일하는 게 힘들다고 마치 나에게 하소연 하는 것 같다.

어느 늦 여름, 소가 흘레끼가 (짝짓기 / 교미) 왔다. 할배도 아는 것 같다. 소는 흘레 때가 되면 자주 울고 몸에 이상이 온다. 진지레기 (끈적한 액체) 가 나오고 풀을 뜯다가 간간히 우두커니 서서 멀리 바라본다. 우리 소 꾼 무리에는 황소 (숫소) 는 같이 오지 않는다. 황소는 주인이 따로 관리를 한다. 황소는 보통 수레 끄는 일을 하고 암소들을 짝짓기 시켜주고 삯을 받는다. 할배가 내일 아침 흘레 붙일 것이라고 한다. 다음날 아침, 할배 따라 갔다. 숫소가 우리 암소 냄새를 맡더니 고개를 치켜들고 코를 찡그리며 이빨을 보이며 소리없이 휘~ 하는 모습으로 웃는다. 모습이 이상하다. 순식간에 우리 소에 올라타고 일을 끝낸다. 20초도 안되는 것 같다. 순간 우리 암소 등이 둥근 산처럼 굽는다. 할배가 소 고삐로 사정없이 소 허리를 내려친다. 소가 움찔한다. “할배요 왜 그랍니까? “왜 소를 때립니까?” 나는 항의한다. 할배는 그래야 새끼가 잘 들어선다고 한다. 옛날부터 그래 왔다고 한다.

내가 중학교 2학년인 1963년 인 것 같다. 봄이 지나면서 보릿고개가 막 지나려고 하는 때다. 그 때 농토가 부족한 농촌에는 배고픔과 기아에 몸부림 칠 때다. 새 보리 추수가 되어야 배고픔을 넘길 수 있는데 그 해 보리가 여물어 갈 무렵 비가 오기 시작하여 보리가 익어야 되는 때에 근 한 달 가량 비가 그치지 않아 들판에 있는 보리가 선 채로 곰팡이가 피고 썩어서 보리 타작을 못하게 되었다. 오랜 역사 속 흉년 중 근 세대의 마지막 흉년인 그 유명한 “계묘년 보리 흉년”이다. 굶주림에 난리가 났다. 긴급히 미국에서 원조해 준 밀가루가 배급되었다. 턱 없이 부족했다. 가구당 배급을 하는데 그 당시 한 집에 결혼한 형제가 같이 사는 집은 배급 더 받으려고 분가 한다고 야단이다. 일부 사람들은 들판에 서 있는 보리를 베어 말려 먹는 사람도 있었는데 전부 다 배달이 났다.

옆집 친구 삼촌의 어린 딸 영자가 상한 보리를 먹고 설사에 보리알이 그대로 나온다 그래서 “영자야 영자야 영자 밑에 톨톨톨” 하면서 놀림 노래도 했다. 학교에 가면 미국에서 원조한 가루 우유를 배급 받아와서 쪄서 식구들이 먹는다. 매우 여물다. 그래도 나는 배고픔을 소 먹이는 산에서 스스로 잘 해결했다.

그 해 또 다른 난리가 났다. 보리를 추수 못 한 농민들은 보리를 갈아 엎고 벼 농사를 위해 모를 심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모를 심고 얼마 지 않아서 가뭄이 들어 비가 내리지 않았다. 대부분 천수답인 그 때. 논에 물을 대지 못해 모 심은 논이 말라서 벼가 타 들어간다.

우리는 논이 4마지기인데 우리 논 모퉁이에 둔벙 (깊은 물 웅덩이) 이 있다. 그래서 드레 (한 말 정도 되는 물 퍼는 동이) 로 나무 삼각대를 세워 걸치고 드레 대를 걸어서 물을 퍼기로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몸이 아파서 누워 계신다. 남자가 할 일인데 내가 해야 될 일이다. 소 먹이고 와서 저녁 먹고 준비하여 가면 밤 8시 반 경 시작하여 밤 12시 넘어까지 물을 펀다. 약 4시간 가량하면 우리 논 바닥에 물이 한 바퀴 돈다. 비 올 때 까지 매일 밤 계속 한다.

가뭄이 오래 인데도 비가 오지 않는다. 다른 논들은 논바닥이 갈라지고 벼가 말라서 죽었다. 낮에 산에서 소를 치면서 하늘을 자꾸만 본다 가끔 뭉게구름이 반갑다. 그런데 비는 뿌리지 않는다. 구름이 원망스럽다.

가끔 물을 퍼고 있는 깊은 밤. 적막한 들판에 호롱불 빛이 논 둑을 따라서 온다. 엄마다. 엄마가 “야야 좀 쉬어라” 한다. 엄마 곁에 앉는다. 엄마가 조그마한 보자기를 푼다. 찐빵을 사왔다. 돈도 없는데.. 늦은 밤 찐빵 2개가 너무 맛있다. 엄마는 내가 찐빵 먹는 것을 애틋한 듯 본다. 나누어 같이 먹으면 될 텐데 나보고 2개 다 먹으라고 한다. 엄마는 가고 나는 한 두 시간 더 물을 퍼야 한다. 내일 새벽 먼 동이 틀 때는 또 소를 몰고 나가야 된다. 잠이 부족하다.

그 해 늦 여름이 되어서야 비가 왔다. 우리 논 부근 들판에서 가을 타작을 한 논은 우리 논 뿐이다. 그 해는 보리 농사, 쌀 농사가 흉년이다. 우리 역사의 마지막 흉년 ‘계묘년 흉년’ 이다.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때 인 것 같다. 전남 광주 공설 운동장에서 전국체전 인 듯 한 경기 중 소나기가 갑자기 쏟아져 사람들이 서로 나가려다 압사 되어 많은 사람이 죽은 국가적인 큰 사건이 있었다. 자성 하는 뜻인 듯. 우리 경남 고성군에서는 각 학교 대표가 나와 그 내용을 근거로 웅변 대회가 있었다. 우리 담임 선생님이 나보고 나가라고 하면서 원고를 써주고 외워오라고 했다. 나는 원고를 들고 소와 함께 산으로 갔다. 그 곳에서 읽으면서 외웠다. 그런데 소의 무리 선두가 방향을 잘못 들어서서 원고를 청골밭골 먼당 (정상부근) 바위 위에 놓고 돌맹이를 얹어 놓고 소를 따랐다. 소를 따라서 다니다 보니 원고 생각은 까마득히 잊고 시간이 지나 해가 저물어서 그냥 집에 왔다. 저녁을 먹고 어두워져 마당에 모기 불을 피워 놓고 평상 위에서 쉬는데 갑자기 원고를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이 생각났다. 큰일났다. 선생님이 써 준 것인데.. 그 시절 선생님은 엄청 위엄이 있고 존경스러웠다. 매를 맞아도 당연히 여기고 선생님 원망하지도 않는다. 선생님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고 했다. 밤에 비나 오면 큰일이다. 나는 컴컴한 어두운 밤에 원고를 찾아 불도 없이 혼자서 산으로 향했다.

그 시절 유아 사망이 많았는데 부모가 죽은 애를 밑에 구멍 뚫린 독 항아리에 넣어서 뚜껑 없이 하늘이 보이도록 밭둑 같은데나 언덕에 반쯤 묻어두는 풍습이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 보면 죽은 애가 보인다. 내가 가는 곳에 그런 곳이 있다. 나의 친구들은 낮에도 겁을 내며 피한다. 그런데 불빛도 없이 어두운 밤에 웅변 원고를 찾아 바위로 향한다. 애기 무덤 옆을 지날 때는 등골이 오싹하다. 그래도 갔다. 내가 어린 나이에 간이 좀 컸던 것 같다.

국민학교 4학년 때 어느 날 밤 태풍이 몰아쳤다. 비도 많이 왔다. 새벽 먼 동이 뿌옇게 밝아온다. 소 마구 앞에서 나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머뭇거린다. 소가 나를 쳐다본다. 내 가는데 마다 소의 눈이 따라다닌다. 나가고 싶은 모양이다. 비가 세차지는 않지만 그래도 온다. 소의 눈이 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삿갓을 챙기고, 소 말뚝에서 고삐를 푼다. “이랴” 소리를 하지 않았는데도 소가 먼저 사립문을 나선다.

소에는 명령어가 있다. 출발 (가자) 는 “이랴”이고, 왼쪽으로 가자는 “좌라” 다. 오른쪽은 없다. “우라”가 없다. 소 고삐가 소의 코 두레에서 뿔을 지나 오른쪽 등과 배를 지나 2~3미터 이다. 고삐를 잡고 가다가 미미한 신호를 주면 오른쪽으로 간다. 가다가 정지 할려면 “워~어” 하고 길게 발음한다. 소가 말을 잘 듣는다.

그 날 다른 소 꾼들은 태풍 때문인지 오지 않았다. 나는 혼자서 소를 몰고 동네에서 가까운 개장골 이라는 산기슭 골짜기로 갔다. 소 고삐를 소 발에 밟히지 않게 소 목에 감아 주었다. 태풍에 큰 나무가 하나 넘어져 있다. 소를 풀 뜯게 하고 호기심에 쓰러진 나무 위에 뛰어올랐다. 잠시 후 나무 아래를 봤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수 많은 뱀이 나무를 중심으로 수십, 수백 마리가 우글거리며 있다.

떼 뱀이다 말로만 듣든 떼 뱀이다. 나무에도 걸쳐져 다양하고 어디서 그렇게 많은 뱀이 모였는지 머리 끝이 쭈뼛했다. 도망갈 통로가 보이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소 있는 방향으로 100미터 달리기 하듯이 뛰었다. 뱀이 밟히든지 말든지 별 탈은 없었다. 정말로 괴상한 상황을 보았다. 태풍 때문일까? 뱀의 장 날 인가? 자연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종종 벌하고 많이 싸운다. 재미도 있다. 그런데 절대로 건드리지 않는 벌이 있다. 땡비 (땡벌) 이다. 땡비는 크기가 조그마하다. 땅 속에 산다. 가만히 관찰하면 벌집 입구 땅 구멍으로 마치 전투기 편대처럼 줄을 지어 여러 마리가 교대로 일렬로 들어가고 일렬로 나오고 하는 것이 특이하다. 사람이 벌집을 건드리거나 소가 모르고 밟았다면 난리가 난다. 다른 벌들보다는 몇 배나 끈질기다. 달아나도 집단으로 따라온다. 소가 땡비한테 쏘이면 다른 벌들과는 달리 펄쩍펄쩍 뛴다. 나도 쏘여보았지만 그 통증이 이만저만 아니다. 다른 벌의 몇 배나 되는 것 같다. 우리 아버지가 벌의 공격을 받으면 달아나다가 움푹한데 엎드려 까악까악 까마귀 소리를 내라고 했다. 까마귀가 벌을 잡아먹나?

나는 학교를 마치면 항상 소와 함께 산야로 가므로 친구들과 동네에서 놀 기회가 없다. 가끔 친구들이 나를 따라서 산에 온다. 같이 벌집도 부수고 꼰도 두고, 자치기도 하면서 논다. 친구들은 가끔 내가 소를 타는 것을 보고 소를 태워 달라고 한다. 그래서 친구를 우리 소에 태우면 소가 절대로 태워주지 않는다. 펄쩍펄쩍 뛰면서 떨쳐낸다. 나는 괜찮은데 친구는 안태 워준다. 소가 나만 사랑하는가 보다.

나는 일상이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고 항상 소와 함께 있다. 주로 혼자이므로 막대기가 나의 노리개이며 그것으로 오만가지의 장난질을 한다. 개구리, 뱀도 잡고 벌집도 부순다. 때로는 혼자서 망개나무 잎을 솔잎으로 엮어 모자를 만들어 쓰고 내가 왕이나 된 것 처럼 막대기를 휘두르며 온 산야를 누빈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걸리고 저 멀리 동네 초가집에서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면 내 소를 타고 터벅터벅 다른 소들과 함께 줄을 지어 냇가를 건너며 집으로 올 때가 참으로 행복한 순간들이었던 것 같다.

우리에게는 오래 전 부터 내려오는 풍습 중에 동네에서 제삿날이 있는 집은 밤에 제사 지낸 후 밤 1시경 제사 밥을 이웃에 돌리며 나누어 먹는 풍습이 있었다. 충분히 먹지를 못하고 배 고픈 시절, 밤 제삿밥은 그야말로 엄청 맛있었다. 여름 어느 날 옆집에 제삿날이다. 밤에 제사 밥이 있겠구나 생각한다. 전깃불도 없는 당시에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 대부분 사람들은 일찍 잔다. 나도 소 먹이고 와서 피곤하니 일찍 잤다. 새벽 잠자는 중에 마루에서 달그닥 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동생들은 이리저리 흩어져 자고 있다. 이웃에서 제사 밥을 가지고 와서 우리집 그릇에 옮겨 담는 소리다. 조금 후 할배, 엄마, 아빠가 방에 등잔불을 켜고 둘러 앉아 제사 밥을 비비는 소리가 난다. 나물 참기름 냄새와 생선 냄새도 난다. 먹고 싶다. 그런데 내가 일어나서 그냥 같이 먹으면 될텐데 왜 그런지 자는 체 하고 일어날려니 민망스럽기도 하고 못 일어나겠다. 혹시 누가 실수로라도 건드려주면 명분 삼아 일어나겠는데 소리만 듣고 있다 밥을 비벼서 먹기 직전 할배가 엄마한테 “저 아이 깨워. 밥 좀 먹여서 재워라” 한다. 귀가 번쩍 반갑다. 그런데 엄마가 “낮에 산에 돌아다니다 피곤 할텐데 깨우지 말고 그냥 놔두자” 고 한다. 너무 실망이다. 밥 먹는 소리를 들으며 목에 침만 삼키고 가만히 있다. 왜 그랬을까? 아무것도 아닌 목적 없는 체면치레 였을까? 밥을 다 먹은 후 할배는 방으로 가고 등잔불이 꺼지고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나도 잤다. 아침 일찍 일어나 소를 몰고 나갔다. 어젯밤 먹지 못한 제사 밥 때문인지 배가 더 고픈 것 같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어느 날 학교에서 집에 오니 아버지가 몸이 아파 누워 있다. 농번기에 바쁠 텐데 아버지가 다른 집 논 논갈이를 가지 못하고 많이 아픈 모양이다. 우리 소도 오랜만에 쉰다. 나는 혼자서 보리밥을 찬물에 말아 김치와 먹고 소를 몰고 풀 먹이려 나간다. 소를 몰고 뒤에서 고삐 잡고 따라가다 보니 소의 진지레기가 나온다. 소가 교미끼가 있다. 조그마한 들 머리벌 옆의 불막등이 라는 낮은 산에 갔다. 농사철이라 소꾼이 모이지 않고 각자 들에서 농사일 한다고 바쁘다. 약간 경사진 묘지 벌 안에서 나와 소 둘만이 있다. 들판에는 군데군데 농부와 소가 모심기 하려고 논 갈이가 한창이다. 우리 소가 풀을 열심히 뜯고 있다. 약 1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일하던 소와 주인이 밀고 당기고 신간 (다툼)이 붙어 야단이다. 소가 주인의 말을 안 듣고 주인한테서 벗어 나려고 하고 주인은 고삐를 당기고 회초리로 때리고 난리다. 결국 소가 메었던 써레와 멍에가 벗겨지고 코에 끼웠던 고삐도 빠지고 소가 맨 몸이 되었다. 소가 주인을 벗어나더니 우리 있는 방향으로 빠르게 뛰어온다. 가만히 보니 우리 소 한테로 오는 것 같다. 그 소는 황소 (숫소) 다. 힘도 세다. 황소는 멀리서 짝짓기 때가 된 우리 소 암 내음을 맡은 모양이다. 금새 우리 소 한테 와서 냄새를 맡고 입을 벌려 소리 없이 하늘을 보고 웃는다. 그리고 짝짓기를 할려고 자세를 취한다. 큰일이다. 돈도 없는데 짝짓기를 하면 삯을 주어야 하는데 흘레를 못하게 막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우리 소 옆에 있는 황소에게 내가 겁도 없이 과감히 오른손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이용하여 황소 코 뚜레에 끼웠던 구멍 뚫린 코에 손가락을 끼워 당겼다. 황소는 약간 멈칫 잠잠하더니 순간적으로 나를 뿔로 들어서 받아 공중으로 날렸다. 나는 공중에 붕 떠서 4~5미터 거리의 풀 밭에 내동댕이 쳐졌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우리 암소에 붙어 볼 일을 본다. 소는 교미 시간이 짧다. 10~20초 정도다. 그런 난리를 피우는 사이 황소 주인이 뛰어온다. 큰일이다. 돈도 없고 욕 먹을 일이 걱정이다. 덩치 큰 황소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하다. 황소 주인이 소 고삐를 들고 왔다. 코에 끼웠던 코 뚜레 반대쪽 고삐로 소 코에 넣어 코를 맨다. 나보고 괜찮으냐고 한다. 나를 혼내지도 않고 짝짓기 삯도 달라고 안 한다. 휴~ 다행이다. 고삐에 코가 매인 황소가 주인 따라 논으로 간다. 집에 가서 할배 한테 이야기 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오니 소가 새끼를 낳는다고 할배가 소 옆에 서 있다. 나도 옆에 섰다. 말 못하는 소가 고통스러운지 앉았다가 서고, 섰다가 앉고 한다. 한참 후 소가 선 채로 송아지 발 두 개가 먼저 나온다. 소가 힘드는지 안절부절 못한다. 조금 후 새끼의 코가 보이고 머리가 나온다. 바닥에는 벼 짚을 두툼하게 깔아 놓았다. 얼마 후 새끼를 훌렁 낳는다.

어미소는 얼른 돌아서서 새끼의 냄새를 맡고 송아지가 둘러 쓰고 나온 태를 먹으려 한다. 할배가 못 먹게 하고 태를 빼앗아 손으로 걷어 모아서 짚단에 싸서 나보고 앞 삼밭에 가서 파 묻어 라고 한다. 초식 동물인 소가 자기 새끼 태를 먹으면 목에 걸려 질식 할 수 있다고 한다. 송아지는 온 몸에 털이 났지만 젖어 있다. 어미가 몸을 핥아준다. 얼마 후 몸이 마르니 일어 설려고 한다. 태어난 지 1시간이 채 안되어 어설프지만 걸으려고 한다. 다음날부터는 산에 따라 갔다.

송아지는 엄마 소 닮아 콧 등이 까맣고 눈도 맑고 예쁘다. 내 송아지라서 그럴까? 송아지는 엄마 소 곁에서 멀리 가지 않고 잘 따라 다닌다. 평소 송아지가 젖을 먹을 대 나도 장난삼아 어미 젖 밑에서 송아지와 같이 젖을 빨아본다. 젖이 잘 나온다. 맛도 있다. 어미소는 내가 그렇게 하여도 가만히 있다. 그런데 송아지 것이라 장난이니 많이 빨지는 않는다. 1~2개월이 지나면서 송아지가 제법 애를 먹인다. 엄마소와 떨어지기도 하고 남의 밭에 들어가기도 한다. 장난기가 많다. 내가 뛰어가서 쫒으면 어미 소 곁으로 얼른 뛰어간다. 송아지는 코도 끼기 전이고 고삐도 매지 않았기에 나를 속 썩일 때가 많다. 그래도 사랑스럽다.

어느 덧 시간이 흘러 새끼 송아지 젖을 뗄 때가 되었다. 어미소는 원 주인한테로 돌아가야 한다. 이별의 시간이다. 어미소와 이별하는 날, 나는 많이도 울었다. 새끼 때 부터 어른 소가 될 때 까지 많은 정이 들었다. 어미소는 꺽쇠 집으로 돌아갔다. 그래도 송아지가 있으니 다행이다. 그 날 저녁 어미 떨어진 송아지가 엄마 소를 찾아 한 없이 운다. 밤을 꼬박 새우면서 운다. 나도 잠을 못 자고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듣는다. 마음이 너무 아프고 애절하다. 꼬박 사흘을 밤낮으로 운다. 나중에는 송아지 목이 쉰다. 하는 수 없다. 소의 운명이다. 그 후 송아지와 나는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가끔 이웃에서 어미소는 두고 젖 뗄 때가 된 송아지를 장에 가서 팔고 온다. 그러면 어미소도 새끼를 찾아 한 없이 운다. 어미 역시 사흘 밤낮으로 운다. 그 애절함이 너무 처량하고 마음이 아프다. 나는 소의 보통 울음과 그 애절한 울음을 구별한다. 그 때도 잠을 못 이룬다.

나에게는 동갑내기 친구 김명일 이가 있다. 바로 옆 집에 살며 나보다 한 달 먼저 태어났다. 그는 가끔 낯선 소를 몰고 소 먹이러 온다. 그의 아버지가 장에서 사와 다음에 팔릴 때 까지 온다. 그는 소아바미로 다리를 절었다. 그를 보면 항상 마음이 짠하다. 그는 산을 타면서 저는 다리로 땀을 뻘뻘 흘리며 소 무리와 이동시 뒤쳐지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한다. 무리에 부담을 안 줄려고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다. 그리고 한 번도 낙오하거나 뒤쳐진 적이 없다. 어떤 때는 더 잘 나갔다. 지금 생각하면 그도 어린 나이에 생존에 대해 뭔가 해야 된다는 것. 가난한 집안에 도움이 되고, 역할을 해야 되는 본능적인 것이 있었던 것 같다. 그와 나는 장남이었다.

모내기 철인 어느 날 명일이와 나는 청골 밭골이라는 산으로 가기 위해 소를 몰고 꾸리방천을 지나 산 기슭으로 가는데 나의 친척 집에서 모 심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못 꾼 중에 1살 아래 동생 뻘 되는 박태훈 이가 다가와 다리를 저는 명일이에게 시비를 걸어 싸움이 붙었다. 어렸지만, 치고 받고 맹렬히 싸우는데 저 쪽 논에서 어른 (박태훈 형) 이 달려온다. 나와 명일이는 겁이 나서 소를 몰고 다급히 산을 향해 도망갔다. 그런데 소가 우리의 다급함을 아는지 “이랴” 한 마디에 앞에서 잘도 뛴다. 친구는 다리를 절면서 소와 함께 잘도 따라온다. 산등성을 올라 능선을 따라 둘이서 소와 함께 한 없이 뛰었다. 뒤에 알고 보니 실제는 쫒아 오지 않았는데도 우리는 순진하게도 잘못했다는 생각에 달렸다. 그런데 소들이 어떻게 우리의 다급한 상황을 알고 보조를 맞추어 앞에서 먼저 그렇게 잘도 뛰었을까? 내가 뒤에서 멈추니 앞서 뛰던 소도 멈춘다. 소와 나는 한 몸인가 보다.

명일이 친구는 나처럼 매일은 아니지만 가끔 소가 생기면 같이 다녔다. 그는 중고 과정을 남달리 어렵게 마치고, 부산대 약대를 졸업하고 또 다른 대학에서 법대를 나와 학위를 받고, 대학에서 강의도 오랫동안 하면서 지금은 약국을 은퇴하여 성공된 삶으로 편안히 지내고 있다. 악착같이 산을 타던 어릴 때 그 의지가 성공의 버팀목이 되었나 보다.

나는 파란만장한 세상의 삶을 살면서 수 많은 일을 만났지만 불평 불만을 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것은 목동 생활을 하면서 열악한 환경에서도 자연과 더불어 소와 주고 받은 사랑과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그 날 그 날 소가 배부르면 만족하고 기분 좋았던 것을 느끼고 살아서 일까? 가난 속에서 하고 싶은 것, 해야 되는 것 등을 하지 못해도 부모님을 탓 하거나 서운한 생각을 어릴 때 부터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내 운명의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이고 불평하지 않고 살아왔다.

나는 참 좋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할매는 내가 6살 때 돌아가시고, 할배, 엄마, 아버지와 3남 3녀. 내 위에 누나가 하나 있고 나는 장남이다. 엄마, 아버지는 국민학교를 못 나왔으나 한글은 읽을 줄 알았다. 할배는 글을 몰랐다. 많이 가난했다. 우리 집은 다투는 소리나 불평 불만의 소리가 없고 늘 이웃들이 많이 와서 집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편이었다. 나는 어릴 때 부터 길을 가거나 모이는 장소 등에 가면 동네 어른들로 부터 칭찬을 많이 듣고 자랐다. 칭찬은 “너의 아버지, 엄마 같은 사람이 세상에 없다. 착하고 법 없어도 사는 사람이다. 네가 크거든 잘 섬기라” 했다. 나에 대한 칭찬이 아니라 부모 칭찬이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안다. 부모님은 가난하지만 남을 도와주고, 남을 먼저 생각하면서 사는 모습을 보고 나는 자랐다.

내가 어릴 때에는 밥 얻어 먹는 거지가 많았는데 밥 때가 되면 거지들이 밥 얻으러 온다. 우리도 배고프고 힘들 때 인데 엄마는 우리 것을 줄여서 라도 양은 적지만 나누어 주는 것을 보아왔다. 아버지도 쳐다보면서 반대를 하지 않은 분위기다. 동네 초상이나 잔치가 있으면 물질적으로는 형편이 안되어 못 도우고, 몸으로 가서 도와주는 것을 보아왔다. 아버지는 형편이 어려운 초상집 장례에 염 (시체를 묶는 것) 하는 일을 해 주곤 했다. 부조 중에는 최상이다. 당시 가정 형편이 어려운 집은 초상 때 돈을 주고 염사를 부르기는 부담스러운 집들이 더러 있었다. 남자가 어리거나 없는 집에는 나를 데려갔다. 혼자 하기 어려우니 주검을 묶을 때 같이 잡아 주어야 했다. 아버지는 나보고 염하는 방법을 알아야 된다고 하면서 가르쳐 주었다. 장례의 어려움이 있는 집에 아무나도 못 하는 일이니 대가 없이 도와 주라고 한다.

엄마는 손놀림이 빠르고 일을 잘해 잔칫집 또는 초상집 큰 일이 있는 집의 부엌 일을 비롯 잡일을 많이 도와 주는 것을 보았다. 무료 부조다.

한번은 어느 해 가을 벼 타작을 하고 동네 농민들이 벼를 말리기 위해 길에다 덕석을 펴고, 군데 군데 벼를 널어 놓았다. 그런데 새벽녘에 비가 한 방울 씩 내리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비가 오니 누구 벼 인지도 모르면서 벼가 비를 맞으면 안되니까 길에 널어놓은 벼를 각각 걷어 모아 덮어서 비를 맞지 않게 했다. 날이 밝아오자 벼 주인들이 와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을 보았다. 내가 생각해도 잘했다고 생각되었다.

나는 살아오면서 부모님을 잘 만났다고 항상 생각했다. 가난하고 못 배웠지만 동네 사람들이 너의 아버지, 엄마가 무슨 국회의원, 장관, 교수라고 하는 것 보다 이 세상에 너의 엄마, 아버지는 법이 필요 없는 사람이다 라고 하는 소리가 나에게 뿌듯하고 자랑스러움을 느끼게 했다.

부모님이 나에게 넘겨준 유산은 배려와 베품이고 그것이 훗 날 나를 평안하게 하고 즐겁고 긍정적인 삶으로 살아 오게 한 것 같다. 배려와 베품 그것을 해 본 사람 만이 뿌듯함과 행복함을 느낄 수 있다. 내가 소 한테 베풀면서 행복을 느끼는 것도 부모님을 통하여 배운 약자와 힘 없는 것에 베품의 훈련 덕이다.

나는 베트남 전쟁에 2년 참전했다. 수많은 전투를 하면서 목동 생활을 했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중부 베트남에서 산악 전투는 정말로 힘든 전투였다. 정글을 겁내지 않고 또 남이 잘 못하는 험한 일도 잘 처리했다. 어느 한 전투에서 헬기로 투입 된 곳이 적의 진지 중심부여서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를 내고 오도 가도 못하고 23일 간을 버틴 적이 있다.

내가 소속 된 우리 맹호 1연대 5중대는 1971년 4월 22일 중부 베트남 빈딩성 푸캇 북방 함몬드 베이스에서 미군이 지원하는 헬기로 오전 일찍 적진 깊숙이 랜딩하여 침투하였다. 그 곳은 호지명 루터 중 하나로 북부 공산 월맹 정규군이 은거하는 혼쩨산 지역 제일 높은 봉우리 정상이었다. 헬기에서 내리자 마자 주위를 보니 깊은 산악 정글 인데도 사람이 다닌 흔적이 있고 길이 반질반질 하다.

분위기와 느낌이 이상했다. 중대장 지시로 1소대가 2번째 봉우리 쪽을 향하여 하향 능선으로 출발했다. 출발 한 지 10분이 채 안되어 갑자기 요란한 총성과 함께 수많은 폭발음이 들리고 교전이 일어났다. 중대장이 긴급히 무전으로 연락한다. 거리도 얼마 아닌데 무전이 안된다. 불러도 무전 응답이 없다. 갑갑하다. 중대장이 나보고 중대본부 무전병을 데리고 가서 현장 확인 하라고 한다. 나는 즉시 단독 군장으로 무전병과 둘이 내리막 길로 달려 가니 얼마 가지 않아 하향 길 끝나는 지점 부근이 난장판이 되어 있다. 소대 무전병 최우연이 머리가 날아가 없고, 목에서 피가 꿀럭꿀럭 나온다. 무전병이 메고 있는 무전기에서 연신 중대장의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중대장에게 상세 설명 할 상황이 못된다. 소대 무전병은 적의 B-40 (적탄통 로켓) 으로 머리를 맞은 모양이다. 소대장은 무전병 옆에 머리를 박고 엎드려 있다. 소대장의 총을 무전병이 깔고 있다. 소대장이 월남 온 지 얼마 안 된 신임 이라서 인지 정신을 못 차린다. 앞 선두에 먼저 나간 부상 당한 병사들이 소대장을 부르며 살려 달라고 고함을 지른다. 곳곳에서 신음 소리가 난다. 내리막 끝자락 인데 오르막 반대편 윗 쪽에서 총탄이 계속 날아 온다. 위치가 불리하다. 적의 매복에 우리가 걸렸다. 나는 나무 밑둥에 몸을 은폐하고 보이지 않는 적 쪽으로 향해 M16 총을 연발로 쏘아 댄다. 위협, 요란 사격이다. 몇 걸음 떨어진 소대장을 보니 부상 당한 것 같지 않다. 가까이 기어 가서 엎드려 발로 건드리며 소대장 하고 불렀다. 소대장이 눈을 뜨고 나를 본다. 부끄러운 모양이다. 무전병이 깔고 있는 피 묻은 자기 총을 끄집어 내어 그도 내가 사격하고 있는 적 쪽 방향으로 사격한다. 정글이고 반대편 윗쪽 적이 보이지 않는다. 적은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다. 나는 큰 나무 밑 둥치가 방패다. 소대장은 상황 판단이 안되는지 자세가 불편한 지 은폐 없이 일어서려고 한다. 적의 정 조준 인 듯한 총이 따다닥 하면서 날아 오는데 그대로 엎어진다. 총을 맞은 모양이다. 얼마 후 눈을 휘둥그레 하고 나를 본다. 그리고 나 있는 데로 올려는지 기어 올려고 엉덩이를 치켜든다. 그런데 또 따다닥 총알이 날아온다. 다시 나뒹굴어 진다. 죽었다고 생각된다. 내 오른쪽 가까이 경남 사천 출신 오영현이가 휴대용 M72 로켓포로 무릎을 꿇고 적 쪽으로 발사 직전 따닥 소리와 동시에 총을 맞고 넘어진다. 조금 후 포복으로 기어 오영현이 한테 가니 목에 총을 맞고 코와 입, 목에서 많은 피가 나온다. 본능적으로 살려 보려고 시도 하지만 곧 숨을 멎는다. 주변 상황이 매우 불리하다. 여기서 더 버티는 것은 의미가 없다 라고 판단된다. 총 맞은 소대장을 보니 눈을 뜨고 나를 본다. 목숨이 길다. 참으로 애처롭다. 같이 간 중대 무전병한테 소대장을 구해서 빠져 나가자고 했다.

내 총을 무전병에게 맡기고 내가 순간적으로 소대장 목 덜미를 잡고 끌어내어 적에게 안 보이게끔 풀섶으로 끌어내서 적의 사격권을 피하려고 내려왔던 정상 능선이 아닌 옆으로 돌아서 포복 하면서 끌고 갔다. 조금 가니 과거 폭격 맞은 곳인지 움푹 한 곳이 있어 들어갔다. 안전하다. 나와 무전병이 휴대한 압박 붕대로 지혈하며 응급 처치 했다. 복부와 하체 등 5군데 총을 맞았다. 상체는 신형 방탄복 철판이 총알을 막아서 다행이다. 소대장의 명이 긴가 보다. 총 맞은 소대장은 땀을 팥죽같이 많이 흘리며 나보고 물 달라고 한다.

나는 그에게 “총 맞고 물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요” 라고 냉정하게 말했다. 그러니 더 이상 물 달라고 안 한다. 담배 하나 달라고 한다. 무전병이 C-레이션 담배를 불 붙여 건네 준다. 적의 사격권을 피해 무전병과 교대로 끌고 엎고 결국 구했다.

1차 공격에서 많은 부상자와 사망자를 내고 뒤로 철수하였다. 제일 앞에 가던 2명의 동료 한기수, 김상대 시체는 적 수중에 있어 회수하지 못했다. 이 때부터 고난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다른 소대가 돌아가면서 여러차례 공격했지만 빈번히 실패하고 퇴각했다. 100미터도 전진 못해보고 23일간 버티었다.

우리는 산 정상을 뒤로 하고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우리 전우들의 죽은 시체는 무더운 날씨와 하루에 한번씩 내리는 비 (스콜) 로 곧 부패 되었다. 구데기가 생기자 나는 전사한 본인의 판쵸 우의에 시체를 말아서 묶어 내 참호 옆에 정리했다. 다른 동료 전우들이 손 대기를 꺼려하는 눈치다. 전투 중에는 시체 수송이 안된다. 긴급한 부상자만 싣고 간다. 부상자 수송하는 헬기도 적이 공격 하므로 부상자 수송 시 여러 대의 무장 헬리콥터 (Gun ship) 가 구조용 적십자 헬기 (다스코프)를 호위 엄호 하면서 무작위로 주위를 폭격하고 사격 하면서 온다. 아주 빨리 정확히 부상자를 달고 간다. 위급한데 그 기술이 아주 좋은 것 같다.

우리가 적과 대치하고 있으면서 우리가 있는 지점 외에는 사정거리 내의 연합군 포병에서 무수히 포를 쏘아 댄다. 그리고 한국군 요청에 의한 미군 전투 폭격기의 폭격이 주위와 계곡에 쉬지 않고 폭격한다. 매일 낮에는 항공기 폭격, 밤에는 곡사포를 수없이 쏘아 댄다. 우리는 아군 포 사격과 미군 항공기 폭격에 신경이 많이 쓰이고 두렵다. 실수라도 하면 큰일이다. 우리 지점에 근접 포격 폭격을 하니 마치 우리한테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실제로 어느 날 아침, 전투식량 C-레이셔를 먹는데 한국군 105mm 곡사포가 실수 오차로 우리한테 떨어져 4명이 사망했다.

우리가 제일 높은 정상에 있다. 아래 건너편에 적군 동굴이 보이고 그들이 떠드는 소리도 들린다. 106미리 무반 동총을 요청하여 공급 받아 적의 동굴과 주위에 쏘아 댄다. 주로 내가 쏘았다. 위력이 대단하다. 그런데 쏠 때는 적들이 두더지처럼 동굴 땅 속으로 들어가 버려 소용이 없다.

중대장이 특공대를 조직하여 야간에 어두움을 틈 타 적 동굴에 기습하기로 결정했다. 나를 포함 5명을 선발했다. 소총과 수류탄만 가지고 가기로 했다. 5명 누구도 못 하겠다고 거부하는 이가 없다. 마지막 인 것 같다. 어머니 얼굴이 떠오른다. 명령이니 그대로 따른다. 얼마 후 작전을 무전으로 연대장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자살 행위라고 중지 명령이 내려왔다. 운명의 갈림길에서 안도와 아쉬움이 공존한다. 그 때 특공대 침투가 있었다면 오늘 까지 내가 있기나 할런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느 날 밤, 새벽 2시경 적군 특공대가 우리를 기습 해 왔다. 갑자기 펑하는 소리에 눈을 떴다. 계속해서 번쩍번쩍 폭발 불빛과 함께 수류탄이 다른 여러 참호 속으로 떨어져 아비규환이다. 어떻게 우리 경계를 뚫고 들어왔을까? 한 호에는 3명이고, 1명은 경계를 서고 2명은 잔다. 나는 우리 호 2명에게 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고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적이 인기척이 나는 곳으로 수류탄으로 던지는 것 같다. 칠흙같은 어두운 밤 보이지 않으니 총도 쏘지 못하고 대응 할 방법이 없다. 완전히 당하는 수 밖에 없다. 곳곳에서 아야 소리 신음소리가 난다. 가만히 소리 내지 않고 있는 것이 최상이다. 시간이 조금 지나 폭발 음이 조용해졌는데도 적군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 할 길이 없다. 긴 시간이 흐르는 것 같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하다. 내가 호 밖으로 소리를 내지 않고 기어나가 어둠속의 주위를 대강 확인하니 적군이 치고 빠진 것 같다. 여기저기 신음소리가 많이 난다. 무전기를 개방하고 본부에 연락한다. 포병 부대에서 우리 정상 상공에 조명탄을 쏘아 밝힌다. 산 정상에 안개가 깊게 자욱하다. 그래도 주위가 훤하게 보인다. 적은 갔지만 아비규환이다. 밤이라 환자 수송 헬기 (다스코프) 가 뜨지 못한다고 한다. 날이 밝을 때 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것이 지옥이다. 또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생겼다.

전투 시작 21일 째가 지나면서 우리 맹호 다른 부대들이 지역을 평정하여 우리에게 가까이 접근해 오고 있다는 무전 연락이 오면서 전사자 시체 수송을 준비 하라는 연락이 왔다.

우리는 106mm 무반동총 포탄 나무 박스를 야전삽으로 뚜껑 없는 관을 만들고 관 하나에 2명씩 넣어 헬기에 매달아 보내기로 한다. 헬기가 온다. 헬기 밑에 관에 묶인 줄을 연결하니 관이 줄에 매달려 공중으로 간다. 달롱달롱 매달려 가는 전우의 주검을 밑에서 보고 다들 많이도 운다. 나도 눈물이 한 없이 흐른다. 얼마 전까지 함께 웃고 생활하던 동료가 주검이 되어 헬기로 이송되는 모습이 차마 못 볼 지경이다. 전쟁의 참화가 빚어내는 비극적인 장면이다.

작전 종료가 되어 갈 무렵 헬기 하나가 착륙한다. 착륙 후 보니 미군 승무원 외에 한국군 한명이 있다. 헬기에서 조그마한 화환 2개가 내려지고 귀한 소주 2병, 마른 명태 2마리 외에 약간의 음식이 내려진다. 조화는 맹호 이희승 사단장 이름으로 보내왔다. 하나는 전사자에게 “이곳에서 산화한 5중대 용사에게 명복을 빕니다.” 다른 하나는 생존자에게 “5중대 용사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라고 적힌 화환을 보내왔다. 소주와 안주는 전사자들을 위한 것 같다.

23일간의 전투는 종료되고 산 자와 죽은 자의 나누임의 장소가 되었다. 나는 23일간 군화를 한번도 벗어 보지 못했다. 내가 입은 전투복은 피와 빗물로 범벅이 되어 말랐다 젖었다를 반복하였고 손은 한번도 씻어 보지 못해 손톱에 피와 시체 물이 말라 붙어 손톱 밑이 새까맣다. 얼굴은 다른 생존자들과 마찬가지로 마치 괴물 같았다. 나는 이 모든 험난한 상황에 잘 대처했다. 나는 이것이 어릴 때 산야에서 목동 생활을 하면서 험한 상황에 잘 대처하는 단련된 행동이 아니었나 생각 되어진다.

작전 철수 후 생존한 전우들이 106 후송 병원에 부상자 병문안을 다녀 온 후 (나는 다른 임무로 못 감) 내게 전달 하기를 부상 당해 후송 갔던 소대장이 다리 둘 절단하고 성 장애인이 되어 곧 한국 대구로 후송 간다며 그가 나한테 자기를 살려주어서 고맙다고 꼭 전해 달라고 했다고 하였다. 그것이 마지막 이다. 다리 둘을 절단하여 잃고 성 장애인이 되었는 대도 그래도 목숨 살았다고 고마워 한다니 묘한 감정이 든다. 어딘가에 살아 있으면 한번 만나고 싶다

우리는 전투를 하면서 적군을 사살하고 포로를 잡으며 매복 시에 적으로 의심되는 용의자도 잡아온다. 그런데 그들은 나 또는 우리들과 개인적으로 전혀 원수 진 일이 없고 미워할 일도 없는 같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자기 입지를 굳힐려고 한 장소에 몰아 넣어 싸움을 붙인 것이다. 결국 서로 살기 위해 죽고 죽이고 싸운다. 나는 사살 된 적군을 정보 수집 차 그들의 소지품을 확인하다 보면 그들의 지갑에는 가족사진, 마누라, 아이들의 사진들이 나온다. 너무나 애틋하고 마음이 아프다. 우리 한국군도 5천명 이상 전사했다. 비극이다. 다들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생명들인가. 그 가족들의 고통은 …

전투는 매우 엄숙하다. 전투 명령이 내려지고 대기하면 말의 수 부터 적어진다 옆 사람과 대화가 줄고 심각한지 담배를 많이 피운다. 전투 중에는 장난기나 적에 대하여 노략질이나 불필요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병사들의 심리가 죽고 사는 문제에 걸렸는데 그러한 마음이 아예 생기지 않는다. 전투를 해보지 아니한 후방의 비 전투 병사들이 꾸며낸 이야기들이 난무 한다. 무슨 산 사람을 총검술로 찔렀 느니, 적군의 신체 일부를 잘라 가지고 다니 느니, 옆의 친구가 쓰러지니 화가 나서 총알이 날아오는 앞으로 뛰어 갔다 느니 전부 거짓말이다. 그런 것들은 심리적으로 한 단계 아래인 약간의 여유가 있을 때나 할 수 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그럴 듯 하게 꾸며낸 이야기들 이다. 나는 많은 전투를 했지만 병사들이 한번도 그렇게 하는 것을 못 봤다. 그렇게 못 한다. 안 한다.

전투 끝나고 부대에 평상으로 돌아가면 후방의 비 전투 병사들이 하는 무용담이 우리의 실제보다 몇 배나 부풀어 꾸며져서 난무하며 돌아다닌다. 전투를 해 보지 못한 자들이 우리보다 더 치열하게 험하게 잔인하게 한 것으로 꾸며서 이야기 한다. 그런 것들이 심지어 언론에도 나오고 하는 것을 보았다.

평소 매복 나간 한국군이 베트콩 용의자를 잡아서 줄을 지어 묶어서 온다. 나는 월남어를 해서 그들을 심문 조사한다. 그들은 무력 앞에서 공포에 질리고 불안해 한다. 나는 그들을 안심 시킨다. 나는 그들의 눈을 보면 소의 눈을 보는 것 같다. 실제로 대부분은 베트콩이 아니다. 나는 척 보면 안다. 나는 즉석에서 심문해 돌려 보내는 권한을 가졌다. 나는 힘 없고 불쌍한 겁에 질린 그들을 안심 시키며 대부분 석방해 주었다. 혹 의심이 가는 용의자가 있으면 먹을 것을 주고 안심시켜 월남군 정보 부대로 보낸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힘 없고 약자 일 때 참 불쌍한 마음이 든다.

한 인생을 살아오면서 많은 일을 했다. 소 먹이던 것, 월남 전투, 회사 운영, 미국 생활 25년. 그 중에서 제일 많이 자주 생각나는 것이 산야를 누비며 소와 같이 지낸 시간이 가장 많이 머리에 떠 오른다. 나의 삶은 소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다  소의 눈에서 인자함을, 소의 뿔에서 함부로 휘두르지 않는 행동, 소 걸음에서 서두르지 않는 침착함을 나는 소에서 인내하는 것을 배우고 월남 전투에서 살아 남았다. 사회에서도 손해를 감수 하면서도 주위에 불평 하지 않고 꾸준히 살아 왔다 참으로 고마운 소다

지금 자라는 아이들이 할 수만 있다면 나와 같은 상황은 없겠지만 가능한 자연과 많이 접촉하고 초식 동물 소, 말, 사슴 등의 눈망울과 자주 마주 쳐다보는 것이 정서에 많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내 생각이다.

나는 고등학교를 가면서 부산에서 자취 생활을 시작으로 9년의 목동 생활을 끝으로 소와 작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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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포로구출 작전 설명(손든 미군 옆이 본인, 본인 뒷줄 왼쪽이 전사한 최달림 본인과 철모사이 뒤 전사한 한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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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지원한 헬기와 조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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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보호작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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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토화된 점령지 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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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포로 구출 작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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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한 전우들의 묘(동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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