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맥주 예찬
미국 서부 해안가 3개 주가 공유하고 있는 특징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서북미 지역에서 27년 가까이 살면서 발견한 것은 우선 사람들의 생각이 비교적 리버럴하다는 겁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사유하고... 이렇다 보니 시애틀은 가장 진보적인 도시 중 하나로 꼽히고 있고, 오리건 주는 미국 내에서 '없는 사람들이 살기 가장 살기 좋은 주' 로 손꼽히고 있고, 오리건 주 헌법에선 아예 공유 수면은 사유화 할 수 없다는 것이 규정되어 있을 정도이며, 가장 진보적 헌법을 갖고 있습니다. 캘리포니아는 UC 버클리나 UCLA 같은 진보적인 학풍의 대학들이 존재하며 소수민족에 대한 감수성도 가장 뛰어난 지역들입니다.
미국의 서부는 늘 진취성을 그 안에 내재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문화적인 충격들이 섞여 자기들만의 문화들이 튀어나온 곳들이기도 했습니다. 캘리포니아의 경우 남쪽의 멕시코와의 문화가 섞인 독특한 '멕시칼리'의 문화가 있지요. 오리건과 워싱턴주엔 네이티브 문화가 많은 영향을 끼쳤고, 여기에 중국과 일본의 문화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일찌감치 차이나타운 형성기에 사회적 갈등을 겪었던 서부지역은 오히려 이 과정을 통해 중국 문화가 지역에서 공고해지는 과정을 겪었고, 이것은 아시아 인들에 대한 차별을 완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들은 70년대 한국인들의 대량이민을 가능케 하는 데 있어 호조건이 되기도 했습니다.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등의 서부 도시로 대량 이민 온 한국인들이 비록 힘들게 경제적 기반을 닦았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한국인들이 이민 오기 전 중국인, 일본인, 그리고 누구보다도 흑인들이 민권운동을 통해 소수민족들이 미국 내에서 권리를 찾으려는 노력을 해 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60년대 대규모 인권운동 이후, 백인 지배층은 오히려 동양인들, 특히 한국인들을 대량 이민시킴으로서 백인 기득권층과 흑인과의 사이에 버퍼를 만들려 했던 측면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나중에 LA에서 벌어진 4.29 폭동을 빈부격차에서 일어난 폭동이 아니라 인종간의 갈등으로 몰아가는 데 한인들을 이용하기도 했지요.
아무튼, 미국의 태평양 연안 3개주는 중부보다는 훨씬 리버럴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 3개주의 또다른 공통점이 있다면, 와인 생산이 활발하다는 거겠지요. 캘리포니아 한 주만 해도 미국 전체 와인 생산량의 90%라는 어마어마한 양을 생산합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 한 주만 떼어놓고 보더라도 세계 제 4위의 생산량을 자랑합니다. 그리고 워싱턴 주가 캘리포니아에 이어 미국 내 와인 생산량 2위, 오리건 주가 뉴욕에 이어 4위를 기록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미국 내 와인 문화를 선도하는 것도 역시 서부 지역인 셈입니다.
그런데... 죄송합니다. 이제 본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공통점이 더 있습니다. 맥주입니다. 현재 미국 내 마이크로브루어리, 즉 소규모의 크래프트 양조장의 숫자는 계속해 늘어나고 있습니다. 포춘 지는 기사를 통해 미국에서 소규모 양조장들이 주류 판매 증가에 기여할 뿐 아니라 이미 2015년 현재 8년째 두자릿수 성장을 하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 이 잡지에 따르면 2015년 크래프트 맥주의 성장률은 13%였으며, 미국 맥주 소비자들이 보다 풍부한 맛의 흑맥주(에일)를 선호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미국 맥주 시장에서 크래프트 맥주 시장은 전년 대비 12%가 늘어났으며, 양조장의 숫자는 총 4천 269 개로서 사상 최대 숫자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버드와이저, 밀러, 쿠어스와 같은 대량생산 맥주를 포함시켜 계상할 경우, 전체 맥주 소비량은 0.2% 줄어들었습니다. 즉 대량생산맥주의 소비량은 줄어들고 크래프트 맥주만 큰 폭으로 소비량이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전미 맥주양조인 협회의 수석 경제분석가 바트 왓슨은 포춘지를 통해 고급 맥주를 찾는 성향이 몇년간 끊임없이 상승해 왔다며, 특히 IPA 와 이와 비슷한 종류들, 고급 라거인 필스너, 그리고 벨기에 스타일의 새큼한 맥주가 인기를 얻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아, 그리고 한가지. '세션 IPA'라는 게 있습니다. 여기선 보통 세션 맥주라고도 하는데, IPA가 식민지 경영 때문에 나온 맥주라면 세션은 1차대전과 2차대전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하루종일 군수품을 생산하던 영국의 노동자들은 네 시간마다 한번씩 이른바 '세션'이라는 브레이크 타임을 가졌고, 이때 마셨던 맥주가 세션 아이피에이입니다. 보통 IPA보다 도수가 약간 낮고, 쌉쌀한 정도도 조금 낮습니다만 그래도 4-5%의 알코올이 포함돼 있습니다. 포터나 스타웃을 마시기보다는 조금 더 '연한 스타일'의 맥주를 '휴식시간 맥주'로 마셨던 겁니다. 아무튼 이래서 영국은 진정 맥주의 나라인 모양입니다.
와인을 좋아하는 저도, 맥주 마실 기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다른 곳 맥주 안 마시고 이곳 로컬 맥주들을 마시고, 끽 해야 캘리포니아 맥주를 마십니다. 심지어는 정말 신선한 맥주를 마시고 싶으면 어머니와 아내와 함께 부모님 댁 바로 근처에 있는 작은(그래도 사실은 꽤 운치있고 큰) 양조장으로 찾아가거나, 우딘빌에 있는 레드훅 브루어리 같은 대형(그래도 중형으로 분류되는) 양조장으로 가서 햄버거와 프라이를 시켜놓고 맥주를 즐긴다던가, 혹은 우리 동네에 있는 '램'이라는 마이크로 양조장에 가서 마시거나 합니다.
정리된 통계들에 따르면, 2014년 캘리포니아와 뉴욕에 생긴 소규모 양조장 숫자를 합한 것이 연초에 614개였습니다. 그러나 이 숫자는 그해 말 884개로 늘어났습니다. 미국 맥주의 고급화란 결국 미국 경제가 성장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짚어야 할 것은 그만큼 고급 와인의 소비는 줄었다는 겁니다. 서브프라임 사태로 인해 실물경제의 바탕이 없는 허황된 주식과 부동산 위주 거품 경제의 바닥이 붕괴되고 나자, 미국은 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와인과 치즈, 시가를 소비하며 길들여 놓았던 자기들의 고급화 된 입맛 자체를 버리지는 못했으나 눈을 맥주로 돌렸던 것이지요. 그리고 지금 캘리포니아, 오리건, 그리고 워싱턴 주는 이런 고급 맥주 생산의 붐이 일어난 지 꽤 오래 됐지요. 과거 와인바들이 있던 자리에 술집이 들어서고, 와이너리가 있던 자리에 맥주 양조장이 들어서는 식입니다. 여기에 맥주 만들 때 반드시 필요한 작물, 홉 hop 의 미국 전체 생산량의 88%가 워싱턴주 산이라는 것도 이곳의 맥주 붐에 한가지 이유를 더 하고 있지요.
갑갑할 때는 그저 시원한 맥주가 최고입니다. 여유를 떨면서 포도주의 향과 감칠맛에 대해 논할 수 있었던 시대가 지나가 버린 것은 미국에서 정치적 선택을 잘못했기 때문이었겠지요. 와인이 나름 정치적, 경제적인 사정을 반영하는 술이라면, 맥주는 이 국민들의 답답한 마음을 반영하는 술일 겁니다. 그리고 미국은 원래 맥주의 나라이기도 하고.
어쨌든 서부 해안 3개주는 미국에서 가장 좋은 맥주들을 생산하는 곳이 됐습니다. 대량생산 맥주의 중심지로 유명한 센트루이스나 밀워키도 아마 지금은 좋은 크래프트 맥주들을 만들어내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훌륭한 품질의 홉, 그리고 좋은 물은 특히 오리건과 워싱턴주 맥주들을 유명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 안 좋은 캘리포니아에서도, 좋은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에선 좋은 맥주들이 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밀도 홉도 나지 않을 것 같은 동토의 땅 알래스카에서도. 그리고 이 맥주들은 서브프라임 위기의 시대를 살아 넘긴 사람들에겐 거품경제 시대의 영화를 추억하면서, 그러나 아직은 불확실한 미래에 조금은 불안한 사람들의 가슴을 달래주는 약이 되고 있습니다.
시애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