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이민자의 삶<전자 수리공/Electronic Technician이 되다.>
(6)이민자의 삶<전자 수리공/Electronic Technician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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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1년이 넘게 제대로 못 자던 잠, 이젠 두 다리 펴고 자게 되었다.
학교에서 인터뷰에 가면 어떻게 하라는 교육까지 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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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하루는 누가 나에게 xx 회사에 가보라고 해서
거기 가면 나 같은 사람들을 찾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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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Glendale시에 어느(xzx) 회사에 갔더니
매니저는 일본인이고 사장은 한국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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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사는 당시는 L.A.에 일대에선 가장 큰 복사기 판매회사였는데
여긴 300 명 가까운 직원들이 판매 및 수리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50여개 나라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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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0 년대엔 복사기가 좋은 것은 작은 승용차 한 대 값이었다.
주로 관공서와 회사, 변호사들이 많이 쓰고 가끔은 글 쓰는 이들이 쓰고 했었다.
그리고 일반 가게에서 복사를 해주고 돈을 받는 곳도 많았다.
당시 복사기는 대단한 인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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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마치고 그 다음 주에 출근을 하게 되었다.
당시 최저 임금은 시간당 $3.25 이었는데 여기선 $9.00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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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8시간을 초과하면 150%의 임금을 받고 주 40 시간을 원칙으로 하며
40시간이 넘으면 역시 150%의 시간 당 임금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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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나의 할 일은 처음엔 오래 된 technician 을 따라 다니면서
판매한 복사기를 설치(set up)해주기도 하고 어떤 땐 수리 call 이 들어오면
가서 수리도 해 주는 일이었다. 몇 달을 하다 보니 혼자서 할 능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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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사엔 특이한 게 있었다. 회사 내에선 누구와 얘길 하던 영어 외는
사용치 못 하게 했었다.
이유는 다른 민족이 들으면 저들끼리 흠담하는 걸로 곡해를 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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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몇 년 후 92년에 L.A.엔 폭동이 일어나 시내는 완전한 난장판이 되어
가게에 있는 물건은 먼저 본 사람이 임자로 막 집어가고 한 쪽엔 가게에
불을 지르고 하여 도저히 불안해서 집에서 잘 수 가 없어 식구들을 태우고
fullerton 에 있는 아는 사람 집으로 피신을 가는데 차를 몰면서 정말 암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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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난 사업을 하는 게 아니고 전자제품 수리 기사이니 이런 난리완
전혀 상관이 없었다. 다 뒤집혀도 내 머리에 들은 건 아무도 못 가져가,
이 x 들아! 하고 중얼거리면서 남으로 남으로 차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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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많은 한인 상가가 피해를 보았다.
그러자 군인들이 들어와 치안을 맡고부터 질서가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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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틀을 거기서 지나고 L.A. 집으로 차를 몰고 올라오는데 조금은
여유 있는 기분이 되자 옛날 들은 한 거지부자 얘기가 생각이 나서
혼자 속으로 쓴 웃음을 지으면서 집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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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아버지와 아들 거지가 구걸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 앞 어느 집에 불이 나서 집이 타고 가족들은
순식간에 거지가 된 걸 보고 있던 아버지 거지가 아들 거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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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저것 봐라, 얼마나 불쌍하고 처량하냐?
우린 저런 걱정은 안 해도 되니 얼마나 다행이냐,
뭐든지 적당히 가지고 있어야 한단다.
넌 그런 걱정 안 해도 되니 이 게 다 애비 덕인 줄 알아라!” 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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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이민자는, 꼭 영어를 해야 하고 다음은 한 가지 기술을 습득하라!
세상이 뒤 집혀도 내 머리에 든 걸 훔쳐 갈 x 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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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어려움이 닥치면 그 때마다 후회하고 남 탓만 할 것인가?
그리고 안 되면 귀국이라도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한 다면
혀를 깨물고 죽을 각오로 영어를 배우고 기술을 배워라!
반드시 좋은 날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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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엔 초기 이민자에게
교육의 문이 열려있다.
영어도 배우고 기술도 배울 수 있는 길이 있다.
물론 돈 한 푼 내지 않고...
나도 두 학교를 일년 넘게 공부를 하면서
무료로 다녔다. 아마 이민 초기자라야 할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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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영어와 기술을 배우고 여기에 살 생각을 하자.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것은 영어와 기술만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