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절 제한, 눈산 조망대-13

윤여춘 2007.07.16 08:12 조회 수 : 2676 추천:32


몇 년 전 서울에 갔다가‘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이라는 해장국집 간판을 보고 실소한 적이 있다. 근엄한 대한민국헌법 전문(前文)에서 기원하는 이 수식어를 아무나 시도 때도 없이 남용해 식상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국민(초등)학교 시절,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한자투성이의 기나 긴 헌법전문을 달달 외우는 녀석이 있었다. 당시 급우들의 경외의 대상이었던 그 친구도 지금은 아마도‘유구한 역사와…’로 시작하는 첫 줄이나 겨우 기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인들 중에는 헌법선포를 기념하는 날인 제헌절 자체를 잊어버린 사람이 많을 듯싶다. 국경일도 정년제인지 한국정부는 제헌절을 60회째인 내년부터 4대 공휴일(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에서 빼기로 결정했다. 주5일 근무제가 한국에서도 보편화됨에 따라 공휴일을 줄이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란다. 작년에는 식목일이 공휴일 명단에서 빠졌다.
원래 제헌절은 광복 3년 뒤인 1948년 총선거로 구성된 초대국회(제헌의회)가 7월12일 제정했지만 당시 이승만 국회의장이 조선왕조의 건국기념일에 맞춰 닷새 뒤인 7월17일 선포했다. 민주정부의 기틀인 헌법을 구 왕조 건국일에 선포한 것이 아이러니하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헌법은 제헌국회 의장이자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 본인이 정권연장을 위해 1952년(직선제)과 1956년(3선 제한 철폐) 두 차례 뜯어 고치는 등 처음부터 가시밭길이었다. 그 뒤로도 툭하면 집권자가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선거제도를 바꾸는 바람에 헌법이 지금까지 모두 9번 다시 쓰여 지는 오욕을 겪었다. 5·16 군사혁명과 12·12 사태 직후엔 헌법이 아예 실종됐다. 현 노무현 대통령도 금년 초‘본인의 임기와 관계없이’현행 5년 단임제를 4년 연임제로 바꾸도록 개헌하자고 제의했으나 반응이 냉담했다.
미국은 그야말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모범헌법을 가졌지만 제헌절 같은 것은 없다. 굳이 따진다면 한국 제헌절 두 달 뒤인 9월17일이 미국 제헌절이다. 1787년 소위‘건국의 아버지들’로 추앙받는 13개주 대표 55명이 필라델피아에 모여 약 4개월 동안 열띤 토론을 벌인 끝에 전문 7조로된 합중국 헌법을 확정한 날이 바로 9월17일이었다.
미국헌법의 백미는 역시‘권리장전’으로 불리는 1차 수정조항 10개조이다. 토머스 제퍼슨의 주창에 따라 헌법제정 4년 뒤인 1791년 12월15일 추가된 이 권리장전의 제1조는 “연방의회는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제한하는 어떤 법률도 제정할 수 없다”고 못 박아 미국인들이 오늘날까지 언론자유를 세계 어느 나라 국민보다도 많이 향유하고 있다.
권리장전은 헌법제정회의 의장 조지 워싱턴의 출신주인 버지니아 헌법을 모델로 했다. 독립선언서가 발표된 해인 1776년 6월 제정된 버지니아 헌법은‘모든 인간은 나면서부터 평등하고,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임을 천명했다. 이 주법은 뒤에 미합중국 헌법은 물론 1789년의 프랑스 인권선언과 1948년 유엔총회서 채택된 세계인권선언의 모체가 됐다.
미국헌법에는 권리장전과 함께 노예제도에 관한 규정들이 오늘까지 고스란히 남아있다. 사문화된 헌법조항들을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둠으로써 역사의 교훈으로 삼기 위해서이다. 미국헌법은 제정이후 처음부터 다시 쓰는 전면개헌이 한 번도 없었고 26개의 수정조항을 그때그때 추가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연속성을 지닌 성문헌법으로 꼽힌다.
미국헌법이 220년간 고고하게 권위를 지켜온데 반해 한국헌법은 40년도 채 안된 1987년까지 9번 바뀌며 누더기가 됐다. 제헌절보다 개헌절이 더 어울린다. 그나마 제헌절이 내년부터는 공휴일에서까지 제외돼 국민들이 하루 쉬는 재미마저 없어지게 됐다.
윤여춘(편집인) 한국일보 시애틀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