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리적 자기애와  Pathological Narcissism & Evil

 

 

  ‘자기애Narcissism’하면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아닌 이기적인 누군가를 떠올립니다. 서점에 가 보아도 ‘어떻게 하면 나르시시스트로부터 상처 입지 않을 수 있는가’하는 류의 제목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나 본래 나르시시즘은 너와 나를 넘어선 인간의 근본적인 조건입니다. 충분한 자기 사랑은 인간의 본래적이고 건강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병적인 나르시시즘은 아이러니하게도 자기에 대한 사랑이 결핍되어 있는 데서 기인합니다. 아이러니하다고 말한 것은 흔히 자기애적 성격장애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를 겪는 사람들에게서 보게 되는 자기 과장, 자만심, 이기심, 타인을 무시하거나 자기 필요를 위해 이용하는 태도는 과히 그 사람 내면의 결핍감과 수치심을 상상하기 힘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한국의 한 드라마 시리즈가 전세계에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인간의 자기 생존, 본능적 생사의 상황에서 벌어지는 경쟁, 그 속에서 매우 뚜렷해지는 인간의 본성-극단적 자기애, 타인을 향하거나 혹은 자신을 향하는 극단적 공격성-이 가져오는 치명적 결과들을 개인적, 집단적 차원을 넘나들며 생생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어찌 보면 한국만큼 생존 경쟁에서 오는 병리적 나르시시즘과 그 파괴성을 잘 알고 있는 사회도 많지 않을 것이기에 이렇게 심리적으로 치밀하게 짜여진 드라마가 나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파괴적이고 악하게 작용할 수 있는 극단적 자기애는 누구에게나 깊이 감춰져 있다가 언제든 드러날 수 있는 것임을, 나에게도 똑같이 해당된다는 것을 새삼 경험하게 해 주었습니다.

 

개인적 차원의 나르시시즘

  한 개인으로서의 병리적 자기애는 사람이 존재 그 자체로 사랑받고 존중받지 못하며 성장할 때 생겨납니다. 아이의 존재 가치가 양육자의 심리적 필요가 얼마나 충족되느냐로 평가되는 상황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공부를 잘 하는가, 순종적인가, 부모와 사회가 원하는 기준에 부합하는가 하는 기준이 아이 자신의 존재 자체보다 더 중요한 무엇이라고 느끼게 된다면, 아이는 사랑받음의 안정감으로 살지 못하고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인정과 평가에 의존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의 인간으로서의 존재감, 주체성이 얼마나 소홀히 취급되고 심지어 공격받느냐에 따라 심각한 수준의 병리적 자기애적 성격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병리적 자기애는 더 심해지면 사이코패스적psychopathic 수준으로 이어집니다. 기꺼이 타인을 파괴해서라도자신의 불안과 시기심을 채우고 타인을 힘으로 지배하려 듭니다. 

 

  현재 40대 초반인 S씨는 어릴 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병든 어머니와 이모 집에서 기거하며 성장하였습니다. 이모는 자신의 언니를 돌보는 것을 자신의 대단한 인간적 미덕이며 희생이라고 늘 내세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병원비가 아까워 자신의 언니, 즉 S씨의 어머니가 병원에 가는 것을 막다시피 하였습니다. 늘 아팠는데 병원에 가봐야 돈만 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모는 늘 S씨와 어머니를 마치 자신과는 신분이 다르기라도 한 것처럼 무시하고 함부로 대했습니다. 결국 초등학생이었던 S씨는 어느 날 어머니 품에 안기러 갔다가 엄마가 숨진 것을 알게 됩니다.

성인이 되어서야 이 심각한 자기애적 성격장애의 이모에게서 독립한 S씨는 제가 만났을 때 심각한 우울증과 PTSD를 앓고 있었습니다. 늘 타인을 두려워하고 자신을 낮추어 평가했지만 그 이면에 항상 타인을 불신하고 경멸하는 측면을 갖고 있었습니다. 피해자로서 깊은 우울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자기애적 병리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집단적 차원의 나르시시즘

  집단적 의식, 문화적 태도가 경쟁적이고 물질적 성공을 지향하는 현대사회에서는 집단 사회 전체가 병리적 나르시시즘에 물들기 쉽습니다. 또한 개인의 본성적 나르시시즘이 집단적 크기로 팽창되고 결합되기도 합니다. 특히 민족이나 국민의 의식적 특징에 지도자의 병리적 나르시시즘이 추동력으로 작용하면 국가 전체가 파괴적으로 악을 행사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가해 집단과 피해 집단에 속한 모두가 결국 인류의 이 본질적 속성 앞에 철저히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잔혹한 자기애와 공격성으로 무장한 자들이 더 생존에 능한 상황이 펼쳐집니다. 홀로코스트를 생존하여 인간 존재에 대한 처절한 인식으로 가득한 문학을 남기고 끝내는 자살에 이른 프리모 레비Primo Levi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 대신에 살아남았기 때문에 부끄러운가? 특히 나보다 더 관대하고, 더 섬세하고, 더 현명하고, 더 쓸모 있고, 더 자격 있는 사람 대신에?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구조된 자들은 최고의 사람들, 선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 메시지의 전달자들이 아니었다. 내가 본 것, 내가 겪은 것은 그와는 정반대임을 증명해 주었다. 오히려 최악의 사람들, 이기주의자들, 폭력자들, 무감각한 자들, ‘회색지대’의 협력자들, 스파이들만이 살아남았다.…나는 물론 내가 무죄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구조된 사람들 무리에 어쩌다 섞여 들어간 것처럼 느꼈다. 그래서 내 눈앞에서, 남들의 눈앞에서 끝없이 스스로를 정당화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느꼈다. 최악의 사람들, 즉 적자 適者 (the fit)들이 생존했다. 최고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집단적 나르시시즘에서 하나 더 짚어가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다. 어떠한 집단적 심리도 개인의 심리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지만, 병리적 나르시시즘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직업군의 특성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특히 인간의 정신적, 영적 영역을 다루는 직업군일수록  인간에게 고도로 발달된 영역을 다루면서 자신들이 인간의 정신적, 영적 문제에 대한 전문가, 답을 줄 수 있는 자, 깨달은 자, 선택받은 자라는 무의식적 신념을 갖게 될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 정신과 의사 또는 영적 영역을 다루는 성직자들을 생각해 봅시다. 환자나 신자들은 이들을 찾아가 자신들의 가장 내밀한 영역을 드러내 보이고 삶의 곤란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합니다. 

 

이때 정신과 의사이든 성직자이든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의 내용들을 계속 성찰하고 내적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자신들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환자나 신자를 자신들의 방식대로 이끌고 싶은 욕망-더 나아가 자신의 뜻이 옳다는 믿음-을 갖게 될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전문적 지식과 훈련을 받았고 혹은 영적으로 기름부음 받았기에,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도움을 받으러 오는 다른 이들과는 나은 존재, 구별되는 존재라는 나르시시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들이 문제를 지적당했을 때, 자신의 오류나 실수를 겸허히 인정하고 함께 답을 찾는 태도를 보일 수 있는가? 그렇지 않고 환자의 병리를 탓하거나 신자의 믿음 탓을 한다면, 그들의 심리적 위치가 너무 높아져 일반 사람들과 눈높이를 맞출 수 없는 것입니다. 

이들의 병리적 나르시시즘이 왜 심각한 문제인가 하는 이유는 무척 명확합니다. 상징적 부모와 같은 역할을 하는 이들이 주는 상처는, 도움을 찾아 온 사람들의 마음에 어린 시절에 시작된 트라우마를 반복적으로 각인시켜 돌이키기 힘든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극복할  있을까

  병리적 나르시시즘을 극복해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어려움과 필요를 인정하고 도움을 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삶에서 실패가 거듭되고 더 이상 다른 이들의 인정과 관심으로 자신을 지탱하는 것이 어려울 때, 이들도 도움의 필요를 인정하고 치료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면 사회의, 집단의 병리적 나르시시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에는 너무 거대해 보이는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분석적 사고를 넘어선, 보다 영적인 언어로 이렇게 말합니다. 

 

“구약성경은 “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한다. 이 요구는 최소한 이웃이 자신만큼 중요해지는 지점까지 자신의 자기애를 극복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은 “낯선 자”를 사랑하라는 요구에서 이보다 훨씬 더 나아간다. 낯선 자는 정확히 말하면 내 집안, 내 가족, 내 나라의 한 부분이 아닌 사람이다… 그저 인간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만약 낯선 자가 당신에게 온전히 인간으로 와 닿는다면 더 이상 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 자신이 진실로 인간다워졌기 때문이다. 낯선 자와 적을 사랑한다는 것은 오직 자기애가 극복되었을 때만, “내가 곧 당신”일 때 가능하다. 

 

The Old Testament says: “love thy neighbor as thyself.” Here the demand is to overcome one’s narcissism at least to the point where one’s neighbor becomes as important as oneself. But Old Testament goes much further than this in demanding love for the “stranger.” The stranger is precisely the person who is not part of my clan, my family, my nation… nothing other than human…If the stranger has become fully human to you, there is no longer an enemy, because you have become truly human. To love the stranger and the enemy is possible only if narcissism has been overcome, if “I am thou.””

 

언어가 통하지 않건, 피부색이 다르건, 혹은 아무리 초라해 보이건 간에  내  주위의 한 사람을 나와 똑같은 인간으로 경험하는 것이 자기애를 넘어서는 관건이 되며 그것이 인간다운 존재 간의 “사랑”이 됩니다. 개인의 이러한 회복이 집단으로 이어져 변화를 가져오며 집단 차원의 인식과 노력이 또한 개인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Reference

프리모 레비(2014),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돌베개

Erich Fromm (1964), The Heart of Man: Its Genius for Good and Evil, Harper and Row

 

 

Dr. SUJIN RHI

한의사(한국(한의 신경정신과), WA), 미국 공인 정신분석가(NCPsyA)

intinst.edu@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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