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검의 기원(대한검도의 기원)

무식이 2009.01.02 16:34 조회 수 : 1192 추천:11

격검의 기원

일본의 역사중 전국시대(막부시대)에는 천황은 도교의 천황궁에서 지냈고 막부에 의해 모든 것을 조달 받던 시대입니다.

  막부 : 막부는 원래 전장에서 장군(사무라이)이 지휘소로 쓰던 천막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그 후 천황을 대신해 일본을 실제로 다스리던 무인정권의 정부를 가리키게 됐다.
  사무라이 : 일본 귀족(우리나라의 양반)의 장군을 이르는 말  
  쇼군(대영주 또는 대장군) : 무사들을 좀 거느린 대영주를 쇼군이라 잘못 알고 있는데.. 쇼군은 동시대 1명뿐이고. 그 자격요건도 좀 까다로워서, 가문이 미나모토(元), 다이라(平)의 혈통이 아니면, 쇼군에 오를 수가 없다. 우리나라의 진골성골과 비슷한 경우라 할 수 있다.  토요토미히데요스(풍신수길)의 경우 그 개인적인 역량은 도쿠가와이에야스보다 높게 평가되지만, 쇼군의 자리에는 오를수 없었다. 간빠꾸(관백-정1품)이라는 문관벼슬에 만족해야 했다.

가마구라막부(1185년-1333년)
무로마치막부(1338년-1573년)
에도(도쿠가와)막부(1603년-1868년))
메이지유신(1868년)

천황은 실제로는 대장군(쇼군)이 만든 각종 제약 속에서 겨우 목숨만 연명하는 꼴이었다. 장군들은 혹시 일부 영주들이 천황을 업고 반기를 들 것을 우려해 천황을 철저히 감시하고 행동을 제약하고 또 굴욕을 주었다.
따라서 천왕은 막부에 의해 패쇄된 성에 겨우 명맥을 유지 하였고, 장군은 가문을 중요시하여 천왕이 없이는 막부의 힘 또한 유명무실 한 것으로 천황이란 이름만이 존재 할 뿐이었다고 한다.
막부의 최고 지도자인 장군은 실제로 일본의 최고 지도자였다. 그리고 외국, 가장 가까운 나라인 조선에서도 일본의 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장군은 형식적으로는 천황으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것이며 실질적으로도 여러 영주들 중 가장 강력한 영주 일뿐 그 영주들의 우두머리는 아니었다. 영주 연합의 의장 정도인 것이다.

당시 일본은 250여 개의 번으로 나뉘어 있었다. 장군은 이 중 단지 가장 큰 한인 도쿄(東京) 일대의 한을 다스리는 가장 강한 영주에 지나지 않았다. 장군의 힘이 막강했을 때는 어느 누구도 여기에 도전하지 못하고 그 명령에 복종했다. 그러나 일단 장군의 힘이 쇠퇴하면서 서서히 반기를 드는 영주들이 나타났다. 그것은 결코 불법도 아니고 위법도 아니었다. 오히려 반란군들이 천황을 업게 되면 장군을 역적이 라고 규정했다.

한편 일본의 마지막 막부체제인 도쿠가와(에도)막부는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 러시아의 푸탸틴 제독 등의 내항 이후, 구미 제국의 강경한 압력에 못이겨 마침내 20년간의 쇄국을 깨고 개국, 무역을 시작하게 됨으로써 국내는 더욱 분열, 혼미해졌다.
사쓰마 ·조슈한이 막부 반대의 자세를 굳힌 가운데, 백성의 봉기 ·폭동이 계속되고 하급무사를 중심으로 정권을 천황에게 돌리라는 존왕양이(왕을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하자는 사상)와 도막(막부 타도 운동)운동이 격화하여, 막부는 쓰러지고 천황이 정치표면에 등장하는 메이지정부가 성립되었다.

따라서 1868년부터 1880년대까지의 메이지 정부의 천황은 전국시대(막부시대)에 천황을 위협하던 사무라이(장군)와 무사들의 칼사용을 금하고, 전통적인 검술도장을 폐쇄시키고 대중 앞에서 칼을 차고 다니지 못하는 규제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1878년이 되자 폐도령을 발표하면서, 검술과 같은 오래된 무예를 일본사회에서 사라지게 하려고 하였다. 이 시기의 검술은 간신히 명맥만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일본 경찰은 검술을 지키기 위해 이 시기에 많은 노력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72년 Sakibara Kenkichi는 격검흥행(Gekken Kaisha)을 조직하여 사람들 앞에서 시범을 보이고 시합을 하여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이것이 대중적 인기를 얻자 몇몇 다른 격검 집단(돈을 받고 격검을 보여주는 쇼단체)이 생겨났다.

옛날에 진검으로 대련을 할 수 없어서 대나무 끝을 헝겊으로 쌓서
빨간 인주를 바르고 하얀 옷을 입고 대련을 했다.
시간을 정해놓고 시간이 다 되면 대련을 종료하고 하얀 옷에 인주 자국이 많이 묻은 사람이진 것으로 하는 시합이 이었다.
이것이 격검의 시초가 되고
지금의 대한검도가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79년에는 동경 시경이 최초로 검술대회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표준화된 기술과 규칙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일본경찰은 이를 역사가 오래된 검술 유파에 스포츠적인 측면이 혼합한 형태로 통합하는 데에 가장 큰 첫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이것이 마침내 근대의 검도가 되었다.

1909년에는 최초의 대학 검도연맹이 만들어졌고, 1928년에는 전일본 검도연맹이 생겨났다. 오늘날 이 전일본 검도연맹은 전일본 거합도연맹과 함께 검도와 거합도에 관한 제반사항을 총괄하고 있으며 그들의 검도정신은 “대일본 제국의 정신함양”이며, 일본은 “세계격검진흥회”본부를 일본에 두고 있으며 세계 곳곳에 그 지부를 두고 있고, 한국의 "대한검도"는 “세계격검 진흥회" " 한국지부”인 것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지금의 대한검도는 베는 검도가 아닌 때리는 검도로서 일본에서도 죽도를 사용하는 격검과 칼을 사용하는 검도로 구분을 하며, 단지 스포츠로서의 의의를 가질 뿐 엄격히 말해 검도는 아니다.
아직도 많은 우리국민 중에 대한검도라는 이름에 속아서 옛날 삼국시대 부터
내려온 전통검도로 알고 있는 이가 많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