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소 로블레스 Paso Robles 는 '참나무 길'이라는 뜻의 스페인어입니다. 이곳에서 양조를 위한 포도가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1790년, 프란시스코 수도회 소속 수도사들이 포도를 기르면서부터이지요. 스페인어 문법에 맞게 쓴다면 El Paso Del Robles 가 되지만, 사람들은 이를 축약해서 그냥 파소 로블레스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캘리포니아가 정식으로 주州로 승격된 것이 1850년, 그리고 파소 로블레스 시가 생긴 것이 1886년이니, 이곳에 미국 정부의 입김이 제대로 들어서기 전부터 와인을 만들어 온 동네인 셈입니다. 물론 처음엔 미사주로 쓰려는 목적이 컸겠지요.

이 지역은 오늘날 4만 에이커의 지역에 포도를 심고, 40종류의 포도를 재배하며, 200개 정도의 와이너리가 몰려 있는 곳이 됐습니다. 물론 미국에 와인 붐이 생기고 나서 생긴 일이긴 하지만, LA와 샌프란시스코의 중간 지점에 있는 이 지역은 오래 전부터 캘리포니아 와인 생산에 있어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특히 1882년 인디애나의 농장주 앤드루 요크가 세운 '아센시온 와이너리'에서 진판델을 처음 생산한 것은 파소 로블레스 와인을 더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된 셈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이 기념비적인 와이너리는 오늘날도 '요크 마운틴 와이너리'라는 이름으로 계속 운영되고 있으니, 그 역사가 대단한 셈입니다.

또 '역사'라고 하는 면에서 파소 로블레스는 여러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폴란드가 공화국이 되고 나서 첫 총리였던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1860-1941)는 파소 로블레스에 처음으로 '쁘띠 시라'라고 불리우는 품종을 가져다 심었습니다. 클래식 음악 팬들에게 그는 불멸의 피아니스트 중 한 사람으로 기억되기도 하지요. 그 당시 이곳에 연주 여행을 왔던 그가 관절염 때문에 투어를 못하게 되자 이곳에서 요양하며 병이 나았고, 연주 여행을 마치고 나서 파소 로블레스로 돌아와 목장 두 곳을 샀고, 여기에 포도를 심은 거지요.

쁘띠 시라는 뺄루쟁, 혹은 뒤리프라고 불리우는 포도 품종으로, 주로 동유럽 쪽 이민자들이 가지고 들어왔던 모양입니다. 실제로 저도 좋아하는 품종이기도 하고. 아주 잉키한, 어두운 색의 와인을 만들어내는 품종이지요. 그리고 파데레프스키는 그의 포도원에 진판델도 꽤 많이 심었다고 합니다. 그가 1923년에 세운 이 와이너리의 이름은 란초 산 이냐시오였습니다.

이 지역에 본격적으로 카버네 소비뇽과 피노 느와가 심겨진 것은 1960년대 말이었다고 합니다. UC 데이비스 양조학과와 전설적인 양조 전문가 앙드레 첼리스체프의 도움을 받아 스탠리 호프먼 박사가 처음으로 이 지역에 카버네 소비뇽과 피노느와를 심은 겁니다. 첼리스체프는 나중에 워싱턴주로 와 샤토 생 미셸의 초기 와인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나파와 소노마가 본격적인 고급와인 생산지로 자리잡을 때, 파소 로블레스는 그저 오래된 와인 생산 지역 중 하나로만 인식됐습니다. 워낙 나파와 소노마가 '핫 베드'이다 보니, 와인 초보들에게 이 지역 와인들은 그저 편안하게 마실 수 있는 저렴한 와인 생산 지역으로 인식돼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인근의 로다이나 파소 로블레스 지역이 속해 있는 캘리포니의 샌 루이스 오비스포 카운티 등 오래 전부터 존재하던 지역들의 와인도 급속한 성장기를 맞기 시작했습니다. UC 데이비스는 실력있는 포도 재배 전문가들과 양조 전문가들을 배출했고, 나파와 소노마의 포화로 인해 이들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면서 캘리포니아의 잊혀져 있던 지역들에 이런 전문가들이 유입되면서 나파와 소노마의 그림자에 묻혀있던 지역들에서도 명주들이 탄생하기 시작한 거지요.

과거에 저렴한 포도주를 만들던 곳들의 포도들이 새로운 현대적 품종들로 바뀌어 나가고, 파소 로블레스엔 새로운 도전이 시작됐습니다. 론 지방의 주요 품종들도 꽤 많이 심기기 시작한 것이지요. 마르산느, 루산느, 그레나슈 등이 심기면서 중부 캘리포니아 최대 와인 산지라 할 수 있는 이곳에서 생산되는 와인들은 과거의 싸구려 이미지를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나파와 소노마 만큼의 인지도는 아니더라도, 파소 로블레스 와인들은 나파와 소노마와는 또 다른 개성있고 풍미 좋은 와인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늘 그렇듯 본론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_-;

고깃덩이가 생겼습니다. 아니, 찾았다고 해야지요. 냉장고 청소를 하다 보니 꽝꽝 얼린 고기가 나온 겁니다. 정확히 말하면 냉장고가 아니라 냉동고를 청소하다가... 아무튼 냉동해 놓은 것이나 건조 보관해 온 것들을 가끔 정리하다보면 이렇게 뜻밖의 횡재를 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오래전에 사 놓았으니 조금 걱정은 되지만, 이게 미국식이긴 합니다. 암튼 고기를 잠깐 녹이다가 그냥 오븐에 허브 솔트, 후추 뿌려 굽습니다. 평소 같으면 당연히 차콜에 불을 붙여 바베큐를 했겠지만, 고기가 몇 덩이 안 되는데다 같이 구울 야채도 없고, 또 소금에 재 놓은 생선도 없고, 무엇보다 고기 양이 많은 것도 아니어서, 고기를 오븐에 굽습니다. 4백도(화씨)의 온도로 오븐을 맞춰 놓고 고기를 넣은 후 20분 정도 브로일한 고기는 아내가 좋아하는 웰던 수준으로 구워집니다.

당연히 이럴 때는 와인을 맞추는거지요. 어떤 와인을 잡을까 하다가 JanKris라는 이름의 파소 로블레스 산 카버네 소비뇽을 열었습니다. 흥미로운 와인입니다. 입안에서 만개하는 제비꽃의 느낌이 재밌는 와인이지요. 이런 인상적인 와인을 만나면 반드시 그 와인에 대해 추적해 봅니다. 세상이 좋아져서 인터넷을 통해 온갖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지요. 그렇게 내가 마시는 와인이 어떻게 세상에 오게 됐는가를 들여다보게 되면 사연없는 와인이란 게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몇 번의 검색, 그리고 클릭질을 통해 내가 마시고 있는 이 와인이 가진 역사와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저는 거기서 꽤 많은 것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아주 강건한 건 아니지만 밸런스 잘 잡힌 이 와인을 만나게 된 건 우연이었습니다. 레이블이 튀는 것도 아닌데 괜히 사람으로 하여금 한번 더 쳐다보게 만드는, 그런 와인들이 있지요. 그리고 저는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온 거였고, 와인은 그러다가 차고 한 구석에서 내가 자기를 다시 찾아 열어주길 기다리고 있었을 겁니다. 어느날 저는 우연히 고기를 발견한거고, 그러다보니 여기에 맞출 와인을 찾아봤고, 이 와인을 열게 된 것 뿐이지요.

그런데 이 와인이 매력을 보여준 겁니다. 차고 구석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와인이 자기의 모습을 뽐낼 때, 저는 이게 꽤 매력적이구나 하고 느끼게 됐고, 그래서 이 와인에 대한 정보를 뒤져보게 됐습니다. 그런데... 알라스, 이미 그 와인은 앞으로는 시장에서 보기 어려운 와인이 돼 있었습니다.

잰크리스 와이너리가 세워진 것은 1990년, 제가 이민 오던 해였다고 하는군요. 파소 로블레스의 서쪽에 위치한 '템플턴 갭'이란 곳에 위치했던 이 와이너리의 이름은 설립자 마크 젠드론과 아내 폴라가 자기들의 두 딸의 이름의 앞부분을 따 만든 겁니다. 큰딸의 이름은 재뉴어리, 작은딸의 이름은 크리스티나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100% 자기들이 기른 포도로만 와인을 생산했습니다. 그들은 멀로, 진판델, 카버네소비뇽, 시라, 산지오베세, 쁘띠 시라, 쁘띠 베르도, 카버네 프랑, 무베드라, 샤도네, 그리고 비오니에 등을 생산했습니다. 와인 붐이 불었을 때, 이들도 꽤 인기를 누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많은 캘리포니아의 와인메이커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서브프라임 사태의 태풍을 맞아야 했습니다.

아마 이자를 감당하지 못했을겁니다. 1990년, 이들이 이 와이너리를 세웠을 때는 은행 금리가 한참 높았을 때였고, 그 금리로 은행에서 돈을 빌려 와이너리를 운영했겠지요. 결국 젠드론 부부는 2011년 파산 신청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와인은 계속 생산했던 모양입니다. 결국 와이너리가 매튜 탈벗이라고 하는 와인 전문가에게 매각됐다가 이게 다시 샌디에고의 한 부동산 업체로 넘어가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인은 계속 생산됐지요. 여기에 마크 젠드론 부부가 계속 관여했는지까지는 찾아보지 못했습니다만, 아무튼 와인에 스며 있는 이런 사연들을 계속 찾아가며 마시게 되면, 그 와인들엔 색다른 의미가 부여될 수 밖에 없지요.

결국 잰크리스 와인은 이후 베리스 셀라라는 곳을 거쳐 바로 근처에서 경쟁하던 카스토로 와이너리에게 팔려 넘어갔으나, 잰크리스라는 이름은 그대로 사용해 왔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다른 와이너리로 완전히 귀속됐는지, 현재는 원래 사용하던 인터넷 도메인 모두가 문을 닫아 버렸더군요. 결국은 이렇게 인상적인 역사를 지닌 와이너리 하나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거지요.

다행인 건, 그렇게 해서 저는 파소 로블레스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는 겁니다. 과거 갤로나 카를로 로시의 싸구려 저그 와인을 만들던 곳들에 새로운 손길과 열정이 가해지고, 그러면서 꽤 괜찮은 와인들이 만들어지고, 그것들이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 등에 밀려 명멸하고 부침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하고, 거기서 내 인생까지도 한 번 더 고기와 함께 곱씹게 되네요. 오늘날 파소 로블레스는 중부 캘리포니아의 꽤 이름난 와인 관광지로서도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와인메이커들이 이곳에서 열정을 쏟아 멋진 와인들을 만들어내고 있지요.

오늘은 파소 로블레스 와인을 찾아 와인 헌팅을 다녀올까 합니다. 가격도 괜찮고 멋진 와인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는 것을 제 입으로 확실히 확인했으니... 그리고 실력과 열정을 겸비한 와인메이커들이 계속 좋은 와인을 만들어주기를 바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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