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나파밸리산 소비뇽 블랑을 만나며

josephkwon 2019.07.08 04:08 조회 수 : 37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81&aid=0000113666

 [함혜리 기자의 프렌치리포트] (8) 흔들리는 포도주 종주국

[서울신문]프랑스에선 “포도주없는 식탁은 태양이 없는 하루와 같다.”고 한다. 그만큼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생활화됐다는 얘기다. 포도주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다. 포도주에 대한 예찬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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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와인을 논할 때 '나파 밸리'를 빼 놓은 수는 없겠지요. 로버트 몬다비, 카를로 로시 등 미국 와인의 기초를 잡은 사람들이 나파 밸리의 와인 산지로서의 포텐셜을 깨닫고 이곳에서부터 포도 재배를 시작했을 때, 이곳의 이름이 이만큼 커다란 의미를 가질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없을 겁니다.

이곳이 와인 산지로서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파에 처음 양조용 포도를 적극적으로 심기 시작한 건 역시 이태리 사람들이었습니다. 이태리 와인이 세계에서도 뛰어난 품질을 자랑하는 것은 이른바 '지중해성 기후'라는, 그들의 독특한 기후 때문이지요. 그리스도 그렇고, 지중해에 면한 국가들이 좋은 와인을 만드는 것은 역시 좋은 포도 때문이고, 그 포도를 길러내는 기후가 바로 지중해성 기후인 겁니다. 여름은 뜨거운 건기, 겨울은 온난한 우기가 되는 기후지요.

이곳의 잠재력을 알아본 사람들의 이름들은 그들의 선조가 이태리 사람들이라는 것이 금방 드러나지요. 미국과 비교했을 때, 정원에 잔디를 심는 게 영국에서 건너 온 앵글리칸의 후예들이 만든 나라인 미국의 전통이라면 이태리는 그런 땅이 있으면 거기에 포도나무를 심는다고 하지요. 그런 곳에서 살던 사람들에게 눈에 띈 땅이 나파였던 겁니다.

아무튼, 나파 밸리는 미국의 포도주 중심지로서 급속히 자라나갑니다. 게다가 1976년 프랑스 빠리에서 열린 미국 와인과 프랑스 와인의 블라인드 테이스팅 경연인 이른바 '빠리의 심판'에서, 미국 와인이 프랑스와인들을 누르고 상위권에 오르는, 그때까지만 해도 '이변'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당시 화이트 와인은 샤토 몬텔레나, 레드와인은 스택스 립 등 각각 나파밸리의 대표 와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최고의 와인으로 뽑혔고, 프랑스 와인 업계는 완전히 뒤집어졌습니다. 그리고 나서 10년 후, 다시 빠리의 심판 속편이 이뤄지는데, 이때 10년 전과 같은 빈티지의 와인으로 겨룬 결과는.. 아예 미국 와인이 1위부터 5위까지를 다 차지해 버립니다.

2006년, 드디어 빠리의 심판 30주년을 맞아 다시 같은 행사를 해 봤습니다. 결과는 역시 미국 와인이 1위부터 5위까지를 차지합니다. 개개 와인의 순위는 조금 바뀌었지만... 그 날을 프랑스 와인업계에서는 '국치일'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무튼... 그리고 나서 와인업계는 엄청난 변화를 겪습니다. 부침도 엄청났습니다. 그런데 미국 와인과 프랑스 와인의 품질 차이는 이렇게 확연하게 드러났지만, 이번엔 승리에 취한 미국이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와인을 마시는 것은 술을 마시는 게 아니라, 몸에 밴 습관, 즉 문화라는 사실을.

미국 와인들로서 훌륭한 와인들이 시장에 많이 출시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인을 더 많이 즐겼던 것은 사실입니다. 미국인들의 파티에도 와인이 등장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질 무렵, 서브프라임 사태라는 전대미문의 악재가 터졌습니다. 은행들이 쓰러지면서 그 은행들이 돈을 빌려줬던 수많은 주택 보유자들은 어떻게든 대출금을 회수해야 하는 은행들과 법원의 차압명령에 따라 집에서 쫓겨났고, 그때까지 거품으로라도 유지됐던 미국 경제는 완전히 거대한 펀치를 맞은 상태가 됐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와인이 입으로 들어가겠습니까?

캘리포니아의 한 방송국은 주인이 집에서 갑자기 퇴거명령을 받아 쫓겨난 집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내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프로그램을 흥미있게 보다가, 집에서 굴러다니는 참이슬 소주병을 보며 이 집이 한국인 소유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인에게 소주같은 술은... 미국인들에겐 맥주지요. 독주의 가격이 원체 세고 맥주와의 가격차가 많이 나다 보니, 미국인들은 '진짜 화가 나는 일이 있을 때' 에는 맥주를 퍼 마시던지, 아니면 독주를 마시는 사람들은 아주 저렴한 캐나디안이나 보드카류의 독주들을 마시거나 하지요.

아무튼, 그때부터 와인이 오가는 파티 문화는 사라져 갔습니다. 재밌는 건, 와인의 소비량 자체가 아주 크게 줄어들진 않았다는 겁니다. 한번 들인 입맛은 쉬이 변하진 않으니까. 대신 와인에 쓰는 돈이 줄어들었지요. 사람들은 자기들이 와인에 쓰던 돈을 '한 등급 낮은 와인을 구입하는 것으로' 줄여나가곤 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실력있는 와인메이커들은 계속해서 늘어났고, 이들은 과거 나파밸리에서나 내던 와인 맛을 센트럴 밸리나 심지어는 샌디에고에서도 만들 수 있는 출중한 능력들이 있었지요.

그래서 나파 와인들은 요즘 매우 착한 가격으로 시장에 풀립니다. (이 이야길 하려고 지금까지 밑자락을 저렇게도) 특히 나파밸리의 주요 와인인 카버네 소비뇽이나 멀로, 피노 느와 품종이 아니라면 다른 와인들은 더 착한 가격으로 풀리기도 합니다. 화이트 와인의 경우 이게 말이 되나 싶은 가격으로 디스카운트 샵에 종종 풀리곤 하는데, 그것은 화이트 와인의 보관 기간이 레드보다 더 짧기 때문입니다. 물론 잘 만든 리즐링이나 샤도네는 10년 정도는 쉽게 버텨주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보관이 잘 된 경우고, 이 선반 저 선반을 옮겨다녀야 하는 경우에 와인은 쉽사리 상할 수 있지요. 그렇게 되면 아예 미국 세일의 특성상, 그런 상품들을 치워 버리고 그 선반에 다른 물건을 올려 놓는 게 더 이익을 보는 길이라고 간주돼 아예 그렇게 디스카운트 샵으로 보내어 치워버리는 경우가 생기는 겁니다.

이른바 새비 savvy 한 와인 애호가들은 이때를 기다립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와인이 들어왔는가 수시로 첵업하며 디스카운트 샵을 뒤지지요. 와인에 대한 상식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게 이때 중요해집니다. 저는 최근 이 디스카운트 샵에 들러 스무 병 가까운 와인을 들여 왔습니다. 그 중에 나파 밸리산 와인이 꽤 된다는 건, 역시 와인 시장에 격렬하다고까지 말할수는 없어도 어느정도 큰 변화가 온다는 것이겠지요. 격동의 시장을 살아남고 돌고 돌아 결국 누군가 '애호가'에 눈에 띄어야만 '제대로 된 죽음'을 맞을 수 있는 그런 와인들이 주인을 기다리는 곳에서 저는 레이블을 살피며, 포일을 살짝살짝 움직여가며 와인 헌팅을 즐겼습니다. 하긴 와인 애호가들에겐 와인을 따서 마시는 순간보다 와인을 구입하는 순간이 더 짜릿한 건지도 모르지요.

그렇게 와인을 사 놓고 나서 며칠 후, 무지무지 덥던 날, 저는 일 다녀와서 소비뇽 블랑 생각이 났습니다. 며칠 전 와인 헌팅 때 사 놓았던 매우 궁금한 나파밸리산 소비뇽 블랑이 있었던 겁니다. 2014년 세인트 클레멘트 포도원 St. Clements Vineyard 의 빈트너스 콜렉션 소비뇽 블랑, 지금이 2019년이니 시음 적기는 지났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소비뇽 블랑은 원래 다른 포도보다 산도가 높아 그 정도 세월은 버틸 수 있는 힘이 있지요. 아내는 더운 날 일 하고 나서 아버지 병원에 들러 저녁을 드리고 나서 운동까지 하고 온 제게 떡국을 끓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치즈와 시금치가 들어간 스파나코피타를 구웠지요.

와인은 오랜 세월이 묻어 있었습니다. 시음 적기라고는 말하기 힘들다고 할까요. 약간의 산화된 기운이 보여 와인은 조금 갈변한 듯 했습니다. 그러나... 소비뇽 블랑 특유의 풀내음과 미네랄이 잦아들어 있던 이 와인이 다시 깨어나는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습니다. 나파 밸리 와인은 특질이랄까, 엄청난 당도가 있었던 듯, 이 와인은 소비뇽 블랑 주제(?)에 무려 14.5%의 알코올 도수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도를 전혀 안 남긴 드라이한 맛, 그러나 뭔가 달큼한 과일 내음이 어우려져 있는 재밌는 모습을 보여주었지요.

아마 산화가 덜 됐더라면, 이 와인은 보다 상큼한 모습을 보여줬을 것이고 그 풋풋함이 와인메이커가 만들고자 했던 재기발랄함이 그대로 살아있었을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조금은 황금색 비슷하게 갈변한 이 와인은 그 대신 지금까지 마셔봤던 어떤 소비뇽 블랑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독특한 관능미를 보여줬습니다. 아마 그것은 약간의 서글픔으로 표현될수도 있는 느낌일겁니다. 오래 전 풋풋했던 소녀가, 지금 이렇게 나이 먹고나서 내내 숨어 지내다가, 어느 날 드레스를 입고 사교계로 나갔을 때... 그 소녀의 오래 전 모습만 기억하고 있던 이들이 가졌을 그런 아쉬움 같은 것. 그렇지만, 그녀와 다시 대화해 봤을 때, 그 원숙미가 훅 드러날 때의 놀라움 같은.

어쨌든, 이 와인으로 저는 롱 위크엔드의 낮술을 삼고 있습니다. 그리스 치즈 만두라고 해야 할까요? 스파나코피타도 조금 구웠고, 이 와인이 가져다주는 상념의 크기가 적지 않습니다. 오래 전, 그렇게 와인에 미쳐 있던 내가 그렇게 와인과 멀어졌던 건 우습게도 정치적인 일들 때문이었습니다. 이명박과 박근헤가 연속으로 집권하던 시절, 저는 와인과 가까워지기 힘들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다시 저는 참 오랜만에 와인을 낮에 조금씩 이리 만나고 있네요. 그래도 조금씩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믿으며.

확실히 나파밸리 와인의 '힘'은 여전하네요. 화이트 와인이 5년의 세월을 이리 잘 버텨 주다니.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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