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를 대표하는 와인 품종이라고 하면 와인쟁이 여러분은 뭐라 하시겠습니까? 빠리의 심판에서 프랑스의 콧대를 꺾어버린 카버네 소비뇽이나 혹은 샤도네 같은 것을 꼽으시겠습니까?

질문을 이렇게 바꿔 보지요. 당신이 와인 초보였을 때 가장 처음 접한 와인인데 마음에 들었던 게 어떤 와인이었습니까? 혹시 품종을 기억하십니까? 저는 이 질문을 여성분들께 드려볼 때가 있는데, 대부분 대답이 리즐링 혹은 화이트 진판델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물론 이게 일반화의 오류의 가능성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콤한 와인은 쉽게 사랑받기 마련이지요.

캘리포니아의 대표적 대형 와인메이커 중 하나인 트린체로 패밀리의 와인 역사상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실수가 있습니다. 진판델 와인을 만들다가 실수로 발효를 중단시켜 버린 겁니다. 껍질의 태닌이 채 우러나오지 않았고, 발효가 완전히 이뤄지지 않은 와인이 만들어졌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로제를 만들어 버립니다. 처음에는 이걸 망했다 생각하고 그냥 다 포기하고 그 뱃치 batch 를 버리려 했답니다. 그런데 그 와인을 조금 마셔보니... 어쩌면 시장에 어필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품종 앞에 '화이트'를 붙였습니다.

원래 레드로 만들려 했던 이 와인이 알코올 도수가 조금 낮은 쉽게 마실 수 있는 달콤한 와인이 됐습니다. 그리고... 이 실수는 트린체로 패밀리에 엄청난 성공을 가져다 줍니다. 오늘날 저렴한 와인의 대명사인 '서터 홈 Sutter Home' 의 화이트 진판델이 태어난 것이지요. 지금도 서터 홈 이름을 달고 나오는 와인의 판매량 중 90%가 화이트 진판델이니 말 다 했지요. 이 실수는 캘리포니아 와인의 대중화를 가져 왔습니다. 와인이 코카콜라처럼 소비되는 시대를 열어 버린 거지요. 원래 음식 먹으며 콜라 먹는 것처럼, 가벼운 음식에 달콤한 와인을 맞추는 게 매우 당연한 일이 됐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파생된 것은 진판델이라는 포도에 대한 재평가였습니다.

원래 크로아티아에서 츠를레나크 카슈텔란스키라고 불리웠던, 현지에선 이미 멸종에 가까운 이 포도는 아마 이 포도를 '프리미티보'라고 불렀던 남부 이태리 이민자들이 가지고 들어왔을 겁니다. 진판델이 웃기는 것이, 한 나무에서 자라는 포도도 익는 속도가 가지마다 다른 데다가, 한 50살 정도 먹은 포도나무는 젊은 걸로 칩니다. 그래서 일부러 나이 많이 먹은 포도나무에서 자란 포도를 더 쳐 주는데, 그래서 '올드 바인 진판델'이라고 부르는 게 더 쳐 주는 겁니다. 또 엄청나게 당도가 높은데다 산도도 적당히 받쳐주는 편이지요. 단, 껍질이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피노 느와와 멀로의 중간 정도라고 할까요? 후추 맛이 적당히 나서 시음자들은 시라와 이 포도를 가끔 헷갈려 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진판델이야말로 캘리포니아의 와인이자 미국을 대표하는 와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미국만의 특징이 가장 잘 살아 있는 와인을 하나 꼽으라면 저도 진판델을 꼽을 것 같습니다. 다른 곳에서 구하기 힘든, 오로지 캘리포니아의 특징을 오롯이 담은, 그리고 이젠 양조 역사가 2백년이 넘어가는 이 포도 품종은 미국 와인의 초기부터 함께 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진판델은? 그것은 이태리 사람들의 종교적 요구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의 가장 바보같은 거대한 실험이자 도전인 금주법 시대, 관리들은 가톨릭 미사에 쓸 와인까지 제조를 막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관리를 쉽게 하기 위해 한 지역에 몰아 놓았었지요. 그게 바로 로다이 Lodi 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에서 가장 널리 재배됐던 품종이 병충해에도 강하고 극심한 가뭄에도 살아남을 정도로 뿌리를 깊게 내린 오래 된 진판델 품종이었던 겁니다. 보통 와인용 포도나무가 30년 정도 되면 그 수령을 다 했다고 생각하고 그 나무들을 파내고 새로운 품종을 심는데, 진판델만큼은 포도나무의 굵기가 웬만한 아름드리 나무처럼 될 때까지도 그냥 놔 둡니다. 그런 '힘'이 있으니, 이 품종은 정말 오랫동안 이곳에서 터줏대감 노릇을 한 겁니다.

로버트 몬다비를 비롯한 일련의 와인메이커들이 나파에 자리를 잡으며 이곳에서 훌륭한 와인을 만들기 시작하자 로다이는 그 빛이 바래버리는 듯 했습니다. 실제로 나파는 엄청난 발전을 했지요. 그러나 로다이에서 터를 잡고 오랫동안, 대를 이어 포도를 기르고 와인을 빚어 온 사람들은 나파를 오랫동안 깔봤습니다. "정신병원 있던 자리에서 와인은 무슨."

나파엔 캘리포니아의 5대 주립 병원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정신병원'이 있었습니다. 캘리포니아 사람들에게 나파 밸리 이야기를 하면 나이든 이들은 머리에 손가락을 대고 빙빙 돌리는 이들이 있다는데, 그 표현이 꼭 우리나라 사람들과 비슷합니다. 한때 나파가 중곡동이나 청량리, 뭐 이런 이름에서 느껴지는 이미지를 가졌다는 건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아무튼 로다이의 와인메이커들은 처음에 나파를 굉장히 깔봤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파, 그리고 소노마는 캘리포니아 뿐 아니라 미국, 더 나아가 전 세계 와인애호가들을 열광시키는 와인 산지가 됐지요. 로다이의 '영광'은 사그라지고.

그리고 진판델 역시 많은 수가 시에라네바다 풋힐이라는 이름의 생산지로 옮겨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유명한 식스티 미니츠의 와인과 심장병 사이의 관계에 대한 방송이 나오고 나서 다시 와인 산업은 폭발하기 시작했지요. 로다이에도 다시 많은 젊은 와인메이커들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제대로 된 진판델'을 만들자는 움직임이 시작됐습니다. 화이트 진판델의 붐은 진판델이라는 포도를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고, 진판델이 가진 그 포텐셜을 제대로 표현해보자는 움직임들이 생긴 거지요.

세게지오, 로젠블럼, 레이븐스우드 등 멋진 진판델을 만드는 와이너리들이 태어났고, 이들은 독특한 캘리포니아 진판델의 풍미를 다시 살려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신흥 와이너리들도 독특한 진판델 만들기에 뛰어들었지요. 1995년 세워진 나파밸리의 루나 빈야드는 나파밸리산 와인들도 만들지만 로다이 지역에 눈을 돌렸습니다. 이곳에서 제대로 된, 그렇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마실 수 있는 그런 진판델을 만들기로 하고 자기들 포트폴리오에 어사일럼 Asylum 이라는 브랜드를 넣습니다. 이는 로다이가 과거 정신병원 부지던 나파보다 포도 재배의 역사가 깊다는 것을 은근히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고 하지요. 이 와인의 뒷면 레이블엔 이런 농담이 적혀 있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과거 나파밸리가 와인들의 뜨거운 침대가 되기 전, 이곳을 돌아다니면 '너, 누가 정신병원에서 빼 줬어?'라고 물어보기 전엔 이곳을 떠나지 못했다고 한다." 이 와인의 레이블 앞뒷면에 나온 곳이 바로 그 문제의 과거 정신병원입니다. 20년 정도 운영되다가 건물이 20세기 초에 지진으로 무너졌다고 하지요.

자기들의 정통 브랜드인 루나 Luna 와는 차별화시켜 옛날 당시 정신병원 사진을 떡하니 집어 넣은 레이블을 날카로운 글씨로 넣어 붙인 어사일럼은, 그 말 자체가 정신병원 격리병동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나파밸리 와인의 과대평가된듯한 명성에 질려 있는 이들에겐 제대로 먹히는 마케팅 선택이었다고 그들 나름으로는 생각했을 겁니다. 어쨌든, 저는 이 와인의 레이블을 보면서 지금 병원에 계신 아버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굳이 다시 와인에 대해 갖는 관심은, 어쩌면 아버지의 사고로 인해 내 일상이 조금 무너졌더라도, 그것을 다시 평상시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삶의 일부로서 받아들이겠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풍부한 과일향, 그리고 시가의 내음 같은 것이 좋습니다. 카버네 같은 무거운 태닌이 치이는 것도 없고, 산도도 적절합니다. 아들놈이 일하는 곳에서 가져 온 연어 초밥과도 어울리고, 코스트코 피자와 소시지 같은 것과도 어울리는, 음식과의 대역이 꽤 넓은 와인이기도 합니다. 금주법이 발효된 동안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로다이, 그 지역의 역사를 담은 와인답습니다. 2011년, 캘리포니아 롱비치까지 차를 몰고 내려가 멕시코 엔세나다까지 크루즈 여행을 다녀오는 길에 이 로다이를 지나 왔었습니다. 그때는 이런 역사를 몰랐었지요. 확실히 아는 만큼 보인다고, 아마 다음에 로다이를 지나게 되면 그때는 조금 더 길게 머물며 이 지역의 양조 역사를 둘러보게 될 것 같습니다. 그 역사엔 마피아들의 역사도 있고, 서부 개척의 역사도 묻어 있지요. 그리고 오늘날 히스패닉들이 겪는 회한들도.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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