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장터’의 애환

윤여춘 2007.08.12 19:39 조회 수 : 2245 추천:51

시애틀 여름은 한인들의 손님접대 계절이다. 줄줄이 찾아오는 친지들을 데리고 가깝게는 스페이스 니들, 멀리는 독일촌을 한 여름에 두세번씩 다녀오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이런 곳에 앞서 보여줄 만한 훌륭한 장소가 있다는 사실을 많은 한인이 간과한다. 시애틀의 혼과 정신이 깃든 다우타운의 발상지이자 세계 각국 이민자들이 각양각색의 비즈니스로 아메리칸 드림을 추구하는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이 바로 그곳이다.
필자도 70년대 말 시애틀을 처음 방문했을 때 이 마켓부터 구경했다. 당시 밤새워 일할 정도로 바빴던 선배 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필자는 다음날 아침 파이크 마켓으로 안내돼 후딱 한 바퀴 돌고는 혼자 페리를 타고 배션 아일랜드에 다녀왔다. 그때는 주마간산 격의 마켓 구경보다 페리 위에서 본 시애틀 다운타운의 스카이라인이 훨씬 더 인상적이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후 시애틀 주민이 된 필자는 파이크 마켓에 홀렸다. ‘소비자와 재배자의 만남’ ‘모든 식품을 한지붕 아래’ 라는 기치를 내건 전국 최고(最古)의 이 재래시장은 현대식 수퍼마켓이나 대형 상가보다 역동적이면서도 서민의 애환이 짙게 서려 있다.
일주일후인 오는 17일, 그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이 창설 100주년을 맞는다. 연초부터 시작된 축제 분위기가 요즘 절정을 이루고 있고 외지 관광객들이 떼로 몰려오고 있다.
파이크 마켓은 자연분만이 아닌 제왕절개 수술로 탄생했다. 1907년, 파운드당 10센트였던 양파가 중간상인의 농간 때문에 갑자기 10곱인 1달러로 뛰었다. 당시 구두 한 켤레 값이 2달러였다. 주부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자 시 당국은 부둣가 언덕에 농장 직판장을 개설했다. 첫날인 8월17일 농부들이 10여대의 마차에 싣고 온 채소들이 순식간에 매진됐다.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 파이크 마켓은 9에이커의 부지에 50개소의 식당, 56개소의 먹거리 업소, 98개소의 각종 소매상점이 들어선 대형 상설시장이 됐다. 마켓 주위에 노인 및 극빈자 450여명을 수용하는 아파트가 여러 채 있고 보건소, 탁아소, 푸드뱅크, 노인회관 등도 마련돼 있다. 이 마켓의 명소 중 명소인 스타벅스 1호점은 1971년 마켓 밖에 문을 열었다가 1976년 현 장소로 이주했다. 순번제로 ‘출연’하는 거리의 악사들이 240여명이나 등록돼 있다. 연간 약 1천만명이 이곳을 찾아오는데 그중 절반가량이 외지 관광객들이다.
이 마켓에서 ‘초이스 프로듀스’라는 청과물 가게를 3년째 운영하는 이주해씨는 요즘 한국과 캐나다에서 오는 한인 관광객들도 많이 본다고 말했다. 이씨는 베이글 샌드위치, 테리야키, 스시, 닭고기, 아이스크림 등 먹거리와 가방, 비타민, 기념품 등을 파는 한인업소가 10여 곳 입주해 있지만 여름철엔 모두들 너무 바빠 서로 얼굴 보기조차 어렵다고 덧붙였다.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은 자본주의 왕국인 미국 내에서 사회주의가 가미된 운영체제를 갖춘 유일한 시장이다. 반관반민의 공공개발국(PDA)이 마켓 관리를 맡아 업소매매나 업종변경은 물론 간판의 규격이나 색깔까지 까다롭게 규제한다. 그래도 시정부가 보태주는 지원금 덕분에 PDA의 렌트는 다운타운 지역의 다른 상가보다 저렴한 편이라고 이 씨는 귀띔했다.
요즘은 월남계 이민자들이 많이 입주해 있지만 원래 이곳은 일본인들의 텃밭이었다. 1939년 입주업소가 515개로 절정을 이뤘다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일본인들이 수용소에 끌려간 1943년엔 196개소로 크게 줄었고, 프리웨이와 수퍼마켓이 등장한 1949년엔 겨우 53개 업소만 남았다. 자연히 마켓 철거론이 강력하게 대두됐지만 두 차례 위기를 용케 모면했다.
파이크 마켓은 우연하게도 한인이민과 역사의 궤를 같이한다. 요즘은 본국인들 사이에 투자이민이 유행이라지만 이민의 본령은 역시 ‘맨손 이민’이다. 앞으로 한국 이민자들이 70년대처럼 많이 시애틀에 건너와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을 거점으로 미국정착의 언덕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오르기를 기대한다. 파이크(Pike)는 원래 언덕이라는 뜻이다.

윤여춘(편집인)  한국일보 시애틀지사